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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E라는 세계 최고의 단체를 통해 처음으로 프로 레슬링 단체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던 다니엘슨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방출 직후 바로 워싱턴으로 다시 돌아가 친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본인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프로 레슬러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워싱턴은 프로 레슬링 대회가 자주 열리는 곳이 아니었기에 이상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이때 다니엘슨에게 연락을 한 단체는 캐나다의 밴쿠버에 있는 Extremely Canadian Championship Wrestling (ECCW) 라는 곳이었다. 참고로 2001년에 다니엘슨이 WWE로부터 방출된 직후 가졌던 한 인터뷰를 보면 WWE 가 방출된 수련생들을 일본의 전일본 프로 레슬링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내용을 언급한 바 있었는데, 결국 없었던 일이 되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자 했던 다니엘슨에게 있어 ECCW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ECCW는 당시 매주 많게는 3개의 대회를 개최하는 단체였다. 거기에 슈퍼 8 토너먼트에서 남긴 활약상이 매우 인상 깊었던 탓이었는지, ECWA의 프로모터인 Jim Kettner도 다니엘슨에게 연락을 하여 대회에 섭외를 하곤 했다.

그러나 방출되기 전, WWE에서 매주 $500 를 받고 있었던 다니엘슨에게 있어 재정적으로 매우 힘든 생활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WWE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기 직전에 할부로 새 차를 구입한 것이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당시 다니엘슨은 무려 12시간을 운전하여 ECCW에 참전하곤 했는데, 대회마다 받았던 금액은 미국 달러로 $45에 불과했다. 여기서 차 기름값을 빼면 사실상 다니엘슨의 수중에는 남는 금액이 별로 없었다. ECWA에선 대회에 참전할때마다 $100를 받았지만, ECWA는 한 달에 한번 대회를 개최하는 데 그쳤다.

결국, 다니엘슨은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뛸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초등학생의 애프터 스쿨 프로그램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비디오/태닝 전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매우 바쁜 시기 속에서 다시 공부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하여 지역 주민을 위한 공립대학에서도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로우 키와는 훗날 ECWA에서 하스 형제를 꺾고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하기도 했다.



2001년 7월 21일에는 ECWA에서 지난 슈퍼 8 토너먼트의 결승전 상대이기도 했던 로우 키와 맞붙었다. 이날 경기의 특별 심판은 릭키 스팀보트였다. 덕분에 마침 릭 플레어 vs. 릭키 스팀보트의 경기를 매우 인상 깊게 보았던 다니엘슨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다니엘슨은 2000년도 초반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 경기 매우 멋진 경기였다고 회상했다. 릭키 스팀보트는 업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베테랑 선수였던 만큼, 대회가 시작되기 전 다니엘슨과 로우 키를 포함해 해당 대회에 참전했던 모든 선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릭키 스팀보트는 경기가 끝난 후, 다니엘슨과 로우 키에게 매우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2001년 10월은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링네임이 프로 레슬링 마니아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시기가 되었다. 브라이언 다니엘슨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APW가 주최한 King of the Indies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2000년도부터 시작된 King of the Indies 토너먼트는 당시 2001년에 2회차를 맞이했던 신생 토너먼트였다.

APW의 프로모터인 故 Roland Alexander 는 2000년도에 개최된 첫 대회에선 주로 웨스트 코스트 지역에서 태어난 선수들을 섭외하여 8인 토너먼트로 꾸몄지만, 2001년도에는 규모를 더욱 더 크게 정하여 2일 연속으로 개최, 총 16명을 섭외하게 되었다. 참가 선수들 역시 한 지역에만 몰두하지 않고, 영국의 더그 윌리암스까지 섭외했을 정도였다. (더그 윌리엄스에 의하면 본인이 태어나서 두 번째로 미국에서 경기를 가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당시 Roland Alexander 는 2000년도에 개최한 King of Indies 토너먼트가 실패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해당 토너먼트를 개최하면서 둔 목표는 바로 ECWA에서 개최된 슈퍼 8 토너먼트급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풋풋했던 다니엘슨과 사모아 조



그리고 이때부터 이미 민두노총이었던 크리스토퍼 다니엘스






APW King of the Indies 2001 참가자 목록:

브라이언 다니엘슨
AJ 스타일스
사모아 조
로우 키
크리스토퍼 다니엘스
프랭키 카자리안
브라이언 켄드릭
슈퍼 드래곤
더그 윌리암스
아담 피어스
故 바이슨 스미스
도노반 모건
스쿳 앤드류스
토니 존스
자디 프란츠
비니 마사로




2001년에 10월 26일 ~ 27일에 있었던 킹 오브 인디스 토너먼트는 2000년대 미국 프로 레슬링계에서 불어난 인디 열풍의 시초에 가까운 대회였다. 대회를 찾아온 관중은 약 300명 정도에 그쳤지만, 토너먼트의 내용물은 많은 프로모터와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당시 ROH를 창단한 RF 비디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 토너먼트를 직관한 레슬링 옵저버의 데이브 멜처는 당시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를 통해 본 토너먼트를 극찬했고, 멜처의 리뷰를 본 레슬링 옵저버의 구독자들은 RF 비디오에 연락을 걸어 해당 대회의 비디오 테이프 재고를 물어보며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2001년-2002년도 미국 내 프로 레슬링 포럼을 보면 해당 비디오를 판매하거나 혹은 다른 비디오 테이프로 교환하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대회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 레슬링 사이트인 레슬링 옵저버를 운영하는 데이브 멜처와 브라이언 알바레즈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준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프로 레슬러로 활동하고 있던 브라이언 알바레즈는 Roland Alexander의 연락을 받고 이 대회의 배틀로얄에 참가했는데, 데이브 멜처는 이전부터 온라인상에서 몇 년 동안 브라이언 알바레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이 대회에서 브라이언 알바레즈를 만나기 전까진 오프라인상에서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브라이언 알바레즈는 2013년 11월에 Roland Alexander 가 세상을 떠나자 비록 Roland Alexander 는 논란이 있었던 사람이었을진 몰라도, 자신에게는 항상 잘해주었던 사람이라며 그를 기리며 추모 메세지를 남겼다.

회사의 비디오 테이프 판매량에 큰 지분을 차지했던 ECW가 WWE로부터 매입되자 직접 단체를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던 RF 비디오의 랍 페인스테인은 Doug Gentry 그리고 게이브 사폴스키와 함께 이 대회를 비디오로 시청했고, 여기서 랍 페인스테인은 Doug Gentry 에게 새로운 단체를 만들기에 충분한 선수들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폴 헤이먼과 함께 하여 ECW의 몰락을 지켜보았던 게이브 사폴스키는 처음에 랍 페인스테인의 아이디어에 반대했지만, 얼마 안 가 랍 페인스테인의 계획에 동의했다. 당시 이들이 ROH를 시작하면서 단체의 핵심 선수로 점찍어두었던 선수들은 브라이언 다니엘슨과 로우 키 그리고 사모아 조였다고 한다.

故 Roland Alexander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유가 되는 한에서 프로 레슬링계의 레전드들을 섭외하여 대회를 관람하게 했다. 딕 베이어, 故 시부야 킨지, 故 레드 베스티엔 그리고 故 닉 복윙클등이 자리를 빛냈다.

첫 라운드에서 故 Roland Alexander는 브라이언 다니엘슨의 상대로 브라이언 켄드릭을 붙여주었다. 이미 TWA 시절때부터 셀 수 없을 만큼 붙어왔던 두 선수는 여러 레전드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음껏 제 기량을 뽐내었고, 여기서 다니엘슨은 브라이언 켄드릭을 꺾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링네임으로 참전했던 브라이언 다니엘슨의 기량이 워낙 뛰어났던 것인지, 링 사이드에서 대회를 관람하고 있던 전설적인 선수들은 다니엘슨을 극찬하기 바빴고, 이날 대회를 직관했던 데이브 멜처에 의하면 다니엘슨과 브라이언 켄드릭의 경기가 끝나자 닉 복윙클과 레드 바스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선수에게 박수를 쳐주었다고 한다.

이 경기를 감명 깊게 본 것은 전설적인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날 대회에 참전했던 슈퍼 드래곤 역시 2002년도에 가진 인터뷰를 통해 2001년 APW 킹 오브 인디스 토너먼트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경기는 다니엘슨과 브라이언 켄드릭의 경기라고 고백했다.



데이브 멜처: 나와 함께 직관을 하고 있었던 레드 베스티엔은 자신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다니엘슨은 자기가 활동하던 시절을 대표하던 최고의 선수들만큼이나 기량이 뛰어난 선수라고 말했었어. 닉 복윙클은 자기가 세계 챔피언이었던 시절에 다니엘슨과 함께 경기를 가졌더라면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었지. 심지어 나한테 다니엘슨에게 만나 그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다니엘슨에 의하면 본인과 브라이언 켄드릭의 경기로 인해 원래 계획이 바뀌었던 것 같았다고 밝혔다. 토너먼트의 16강전이 열렸던 첫 대회가 끝난 후, 닉 복윙클은 Roland Alexnader 를 직접 찾아가 "만약 자네가 저 아이(다니엘슨)를 밀어주지 않는다면 말이지. 자네는 미친걸세." 라고 말했고, 토너먼트를 주최한 프로모터인 Roland Alexander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8강전에서 영국의 더그 윌리엄스를 꺾은 다니엘슨의 4강전 상대는 당시 APW가 운영하고 있던 트레이닝 스쿨의 헤드 트레이너인 도노반 모건이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4강전에서 다니엘슨은 도노반 모건에게 패할 예정이었고, 도노반 모건은 그대로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틀어져 다니엘슨이 도노반 모건에게 승리를 하는 것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결정에 도노반 모건이 노발대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도노반 모건을 분노케한 결정적인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Roland Alexander는 다니엘슨과 브라이언 켄드릭의 경기를 워낙 인상 깊게 본 것이었는지, 경기 직후 브라이언 다니엘슨과 브라이언 켄드릭에게 APW가 운영하는 프로 레슬링 도장의 헤드 트레이너가 되어주길 부탁했다. Roland Alexander는 당시 도노반 모건이 일본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새로운 헤드 트레이너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에 도노반 모건은 일본의 프로 레슬링 NOAH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비록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Roland Alexander는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즉답을 하지 않은 다니엘슨과 켄드릭은 이후 도노반 모건에게 트레이너로서의 생활은 어떤지 조언을 구했지만, 정작 도노반 모건은 아직 Roland Alexander 에게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Roland Alexander로부터 트레이너 제안을 받았던 다니엘슨과 켄드릭에겐 아무런 죄가 없었기에 도노반 모건은 Roland Alexander 에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4강전에서 치러진 도노반 모건과 브라이언 다니엘슨의 경기는 졸전으로 이어졌다. 감정이 상한 도노반 모건이 제대로 경기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01년 10월은 브라이언 다니엘슨이 프로 레슬러로 데뷔한 지 2년도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니엘슨은 FMW에 참전했을 때 현지 일본 기자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급기야 이 토너먼트를 통해 레전드들을 놀라게 했으며, 나아가 토너먼트를 주최했던 Roland Alexander 로부터 단체가 운영하는 프로 레슬링 도장의 헤드 트레이너가 되어 달라고 제안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담 Roland Alexander는 데뷔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고작 20살밖에 되질 않았던 다니엘슨에게 헤드 트레이너직을 제의하게 된 것이었을까.



Roland Alexander: King of Indies 토너먼트 기간 동안 난 이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친구에게 정말 감동했어. 레슬링 실력도 최고인 친구였지만, 내가 그 친구를 인터뷰하게 된 이유는 레슬링 실력 때문만이 아니었어. 특히나 대다수의 선수가 다른 선수와 맞붙으면서 기량을 발전하는 곳인 Boot Camp 에서 엄청난 노력을 하더라고. 그야말로 열정을 보여주더군. 인성도 훌륭한 데다가, 고작 21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쌓은 지식은 엄청났어. 솔직히 난 말이지. 이 친구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No.1 인디 레슬러라고 봐.

내가 봤을 땐 과거에 비해 이 아메리칸 드래곤 덕분에 앞으로 우리 프로 레슬링 도장에서 더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수업이 끝나고 난 뒤에도 3시간 동안 남는 것은 물론이며,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도장을 찾아와서 훈련생들과 함께하지. 비록 체구가 작긴 하나, 육체적으로도 보기 좋은 녀석이기도 해. 훈련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내추럴 이라는거야. 녀석은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아. 게으르지도 않을뿐더러, 훈련도 열심히 하고, 또 수련생들에게도 훈련을 열심히 하길 요구하는 친구지. 정말 인성적으로도 좋은 친구이자, 아주 환상적인 레슬러야.



결승전에서 브라이언 다니엘슨은 또 한 번 로우키를 만나게 되었다. ECWA가 주최했던 슈퍼 8 토너먼트의 결승전에서 만난 것을 시작으로, 두 선수는 이미 2001년에만 몇 차례 맞붙었지만, 그때마다 두 선수의 호흡은 더 나아졌고, 경기의 질도 더욱 좋아졌다.

다니엘슨은 대게 기량이 좋은 선수들과 맞붙을 때면 자기 자신을 낮추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우 키의 실력은 다니엘슨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매우 진지하게 프로 레슬링에 임했던 로우 키의 성격은 다니엘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니엘슨은 훗날 저스틴 로버츠의 목을 졸랐던 사건으로 인해 WWE로부터 방출되었을 때, 로우 키 같은 선수가 자기처럼 윌리엄 리걸이나 숀 마이클스로부터 훈련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라며 로우 키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 인정해주는 코멘트를 남겼다.





다니엘슨의 우승을 결정지었던 캐틀 뮤틸레이션






결승전에선 캐틀 뮤틸레이션을 통해 로우 키에게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캐틀 뮤틸레이션은 다니엘슨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을때 부터 사용해왔던 기술이었지만, 본인의 피니셔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지난 ECWA의 슈퍼 8 토너먼트부터였다고 한다. 이후 이 캐틀 뮤틸레이션이란 기술은 브라이언 다니엘슨이란 프로 레슬러를 대표하는 기술로 자리 잡게 된다.





무토 케이지가 사용하던 캐틀 뮤틸레이션



다니엘슨이 캐틀 뮤틸레이션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일본의 전설적인 프로 레슬러인 무토 케이지 때문이었다. 무토 케이지는 당시 그레이트 무타라는 링네임을 사용하여 미국에서 경기를 가지곤 했는데, 다니엘슨이 이 기술을 처음 본 대회가 1989년 12월 13일에 열린 스타케이드 대회였다. 당시 라운드-로빈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던 이 대회에서 무토 케이지는 릭 플레어, 스팅 그리고 렉스 루거를 상대했는데, 경기 도중에 무토 케이지는 종종 캐틀 뮤틸레이션을 사용했다. 이날 해설을 맡고 있던 해설자들을 포함해서, 대다수의 관중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서브미션 기술 중 하나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다니엘슨은 이 기술을 보고 매우 멋지다고 느꼈으며, 이후 이 기술을 본인의 것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인이 사용하던 기술을 캐틀 뮤틸레이션이라고 부르기 전에 다니엘슨은 그저 브릿징 더블 치킨 윙과 같은 매우 기본적인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이후 다니엘슨이 이 기술을 캐틀 뮤틸레이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ECWA 슈퍼 8 토너먼트에 참전했을 때였다.



브라이언 다니엘슨: 내가 이 캐틀 뮤틸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은 슈퍼 8 토너먼트에서 Reckless Youth 랑 경기를 할 때였어. 난 Reckless Youth에게 바로 전 경기에서 브라이언 켄드릭에게 서브미션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번엔 풀 넬슨 스프렉스를 사용해서 이기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러자 Reckless Youth는 자기를 캐틀 뮤틸레이션으로 이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더라고. 난 도대체 캐틀 뮤틸레이션이라는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Reckless Youth 는 날 바보처럼 쳐다보며 "그 서브미션 기술이 그렇게 불려." 라고 말해주곤 떠나더라고.

Reckless Youth 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경기에서 캐틀 뮤틸레이션을 사용해서 승리했지만, 이름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서 이 캐틀 뮤틸레이션이라는 단어를 다시는 안 들을 줄 알았어. 근데 나중에 크리스토퍼 다니엘스하고 경기를 했을 때, 다니엘스도 이 기술을 캐틀 뮤틸레이션으로 부르지 뭐야. 이후 ROH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모두가 이 기술을 캐틀 뮤틸레이션으로 불렀어. 나 빼고 모두가 말이야.

그래도 난 이 기술명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된 거였는지도 몰랐었고,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그냥 뚝심 있게 브릿지 더블 치킨 윙으로 불렀었지. 근데 내가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도 이 기술은 그냥 캐틀 뮤틸레이션이라는 기술명으로만 알려지겠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어. 2002년 말쯤에 말이야. 인생이라는 게 참.



결과적으로 브라이언 다니엘슨은 이 토너먼트를 통해 전 북미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무엇보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ECWA가 주최했던 슈퍼 8 토너먼트와 APW가 주최한 킹 오브 인디스의 토너먼트가 연달아 성공하자 업계 관계자들은 ECW를 중심으로 불어났던 하드코어 유행을 순수한 경기력으로만 승부하는 스타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 성공했다.

해당 대회가 영향을 미친 곳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매트 레슬링의 본 거장인 영국에서도 이 대회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2012년 11월에 출간된 The True Story of British Wrestling's Revival 라는 책에선 킹 오브 인디스 2001 대회를 미국 프로 레슬링 역사에 분수령이 될만한 대회였다고 극찬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대다수의 미국 프로 레슬링 팬들의 시선이 WWE의 인베이젼 각본에 모여있을 때, 인디 프로 레슬링 업계에선 훗날 프로 레슬링 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킬 태풍을 예고하는 잔잔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참고하면 좋을 것들

1. APW 킹 오브 인디스 2001 토너먼트의 결승전인 다니엘슨 vs. 로우 키의 경기는 데이브 멜처로부터 ****1/2의 별점을, 다니엘슨 vs. 브라이언 켄드릭의 경기는 ****1/4 혹은 그 이상의 별점을 받았습니다.



2. APW 킹 오브 인디스 2001 주요 경기 영상:

브라이언 다니엘슨 vs. 브라이언 켄드릭:
https://www.youtube.com/watch?v=ByXFSsOlkso
https://www.youtube.com/watch?v=-GmxJVbodSY

브라이언 다니엘슨 vs. 로우 키
https://www.youtube.com/watch?v=OtmatdatPdk



3. APW 킹 오브 인디스 2001 토너먼트 결과







PS- 배트맨 vs. 슈퍼맨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그냥 무난히 재밌게 봤습니다. ㅎㅎ

PS2-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일요일 잘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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