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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came through the curtain and I guess my eyes were blood shot and Shawn asked me if I was okay and I said; Jesus Christ that kid is good." - Rudy Boy Gonzalez (2015/11, Interview)



브라이언 다니엘슨의 정확한 데뷔 시기는 사이트마다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심지어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곤 한다. 예로 브라이언 다니엘슨을 가르쳤던 루디 보이 곤잘레스는 브라이언 다니엘슨의 커리어 첫 상대가 본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니엘슨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첫 데뷔 상대는 브라이언 켄드릭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서전에선 브라이언 켄드릭과 데뷔 첫 경기를 가졌던 날은 1999년 10월 4일이었다며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다니엘슨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루디 보이 곤잘레스와 경기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1999년 10월 16일 자 TWA 첫 TV 녹화에서 다니엘슨은 루디 보이 곤잘레스를 상대로 경기를 가졌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아마도 루디 보이 곤잘레스는 다니엘슨의 첫 TV 녹화쇼 상대가 본인이었다는 것을 다니엘슨의 커리어 첫 경기 상대로 잘못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프로 레슬링 도장을 운영하던 숀 마이클스는 Texas Wrestling Alliance 라는 본인만의 단체도 운영하고 있었다. 2002년도에 완전히 복귀하기 전, 숀 마이클스는 TWA를 통해서도 프로 레슬링 업계에서 멀어지지 않고 감각을 유지했다. TWA에선 선수가 아닌 다른 역할로 활동을 했던 숀 마이클스였지만, 2000년도엔 베놈이란 레슬러를 상대로 복귀전을 가지기도 했다. 이는 숀 마이클스가 레슬매니아 14 이후 2년 만에 처음 가졌던 경기였다.


TWA는 숀 마이클스 밑에서 프로 레슬링을 배우고 있었던 훈련생들에게도 기회의 무대였다. 연습을 통해 배웠던 것을 실전에서 보여줄 수 있었으며, 동시에 도장을 졸업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TWA에는 숀 마이클스로부터 훈련을 받은 훈련생들 외에도 텍사스를 위주로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나타나 활동을 했다.


원래 다니엘슨은 본인의 데뷔전에서 랜스 케이드와 맞붙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3일에 랜스 케이드가 부상으로 경기를 강행할 수 없게 되자 브라이언 켄드릭을 상대로 데뷔하게 되었다. 다니엘슨에 의하면 함께 훈련을 하며 친구로 지냈던 만큼 랜스 케이드보단 브라이언 켄드릭쪽이 더 편했다고 한다.


다니엘슨에겐 이미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던 가운데, 브라이언 켄드릭은 자신의 링네임을 스팽키로 전했다. 성적인 의미가 짙었던 링네임이었다. 다니엘슨과는 달리 브라이언 켄드릭은 경기복을 구하기 위해 멕시코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기믹이 기믹이었던 만큼 경기복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프로 레슬러가 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했었던 다니엘슨이었지만, 정작 본인의 링네임이나 테마 음악등은 전혀 생각해두지 않았다. 처음으로 부여받았던 아메리칸 드래곤은 스승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였으며, 다니엘슨의 첫 테마 음악도 숀 마이클스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첫 경기를 앞두고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다니엘슨은 숀 마이클스의 선택에 따로 이의를 제기하진 못했지만, 그리 맘에 들진 않았던 모양이다. 훗날 자서전에선 역대 최악의 앤트런스 음악까진 아니겠지만, 역대 최악에 매우 가까웠다며 혹평했다. (브라이언 켄드릭은 본인의 테마곡으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Genie in a Bottle 을 선택했다)






다니엘슨의 첫 테마 음악이었던 Bruce Springsteen 의 Born in the USA




다행히 링 위에 오르는 순간 다니엘슨의 긴장감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의 훈련을 통해 합을 미리 맞추어봤던 탓일까. 다니엘슨과 켄드릭은 데뷔전에서부터 저먼 스프렉스나 문설트와 같은 기술을 시도하기도 했다. 비록 Far West Rodeo 를 찾은 200여 명의 관중들은 두 신인 선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로 데뷔전을 가진 두 신인 선수를 환영했다. 결과는 10분 초과 시간제한 무승부로 끝이 났다.


자서전에선 표기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가진 한 인터뷰를 보면 다니엘슨은 경기 후 숀 마이클스가 두 선수의 데뷔전을 보고 너무 기뻤던 나머지 우발적으로 링위로 올라와 관중들에게 "여러분께선 앞으로 TWA에서 이런 경기를 자주 보게 되실 겁니다!" 하고 프로모를 남겼다고 한다. 자서전에선 이 내용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숀 마이클스가 다니엘슨과 켄드릭의 활약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다니엘슨의 상대는 주로 브라이언 켄드릭이나 루디 보이 곤잘레스였다. TWA의 첫 TV쇼 녹화에선 루디 보이 곤잘레스를 상대하기도 했다. 당시 TWA의 TV 쇼의 러닝 타임은 30분이었기에 쇼에 등장하는 선수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다니엘슨은 TV쇼를 통해 짤막하게나마 프로모를 선보일 기회가 있었는데, 결과물은 그리 좋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한 지 1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다니엘슨에게 일본의 FMW에서 활동할 기회가 찾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일본에서의 활동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이후 다니엘슨은 랜스 케이드와 함께 잠시나마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다.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두 선수가 FMW에서 뛸 수 있었던 것은 숀 마이클스의 도움이 컸다. 당시 숀 마이클스는 1999년 11월 23일에 있었던 FMW 10주년 대회의 특별 심판을 맡았었는데, 자신의 두 수련생을 FMW에서 뛰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FMW의 10주년 대회는 투자한 것에 비해 결과는 대참패였고, 이는 당시 FMW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언급한 김에, 이야기의 중심에서 잠시 벗어나 당시 숀 마이클스가 FMW에 참전하게 된 경위를 살짝 살펴보자. 이때 숀 마이클스는 WWE와 여전히 계약된 상황이었지만, WWE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었다. WWE와 계약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은 숀 마이클스 본인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었는데, 예로 작년에 자서전 출간을 앞두고 WWE.com 측과 가진 공식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숀 마이클스 본인도 약물과 부상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999년 당시 PWTorch 측에서 유료 회원들을 상대로 출간한 뉴스레터를 읽어 보면 흥미로운 루머들이 보인다. 1999년 9월~12월 사이에 숀 마이클스를 중심으로 보도되었던 주요 뉴스와 루머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 시기에 PWTorch 뉴스레터를 담당하는 사람은 웨이드 켈러였다. 웨이드 켈러는 1987년부터 PWTorch 를 운영하고 있는 업계의 베테랑 기자이다.


- 1999년 9월 10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65호에선 숀 마이클스가 WWF 공식 웹사이트와 음성 인터뷰를 한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숀 마이클스가 주장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최근 백스테이지 분위기에 대해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적어도 옛날 환경에 비해선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선수들 사이에서 이 사람은 그런 걸 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들려온다.


2. 트리플 H는 충분히 챔피언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더 일찍 챔피언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섬머슬램에서 진작에 됐어야 했다. 평가를 하기엔 충분한 정보가 없긴 하다만, 섬머슬램 1999의 메인 이벤트는 트리플 H vs. 스티브 오스틴의 싱글 매치가 돼야 했었고, 여기서 트리플 H가 이겼어야만 했다.


3. 내가 알고 있기론, 스티브 오스틴이 다쳤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쩌면 다른 선수를 추가해야 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 나 역시 레슬매니아 14에서 그런 혜택을 받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4. 프로 레슬링 비지니스에서 이 숀 마이클스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숀 마이클스가 섬머슬램에 참전했다면 그딴 엿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정되어 있었던 그대로 진행되었을 테지.


- 1999년 9월 25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67호의 주요 헤드라인 중 하나는 바로 '스티브 오스틴을 비판한 문제로 인해 숀 마이클스가 TV에서 아웃되다.' 였다. 숀 마이클스의 인터뷰는 수뇌부가 분노한 것은 물론, 디스의 당사자였던 오스틴 역시 매우 화가 났다고 웨이드 켈러는 보도했다. 짐 로스가 숀 마이클스를 특별 심판으로 보내주기 위해 WWF가 FMW와 협상을 시작했다고 알려주었다는 사실도 567호에서 보도되었다.


- 1999년 10월 2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68호에선 숀 마이클스가 11월에 있을 FMW 대회에서 특별 심판 역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되었다.


- 1999년 10월 13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70호에선 숀 마이클스는 여전히 WWE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 1999년 10월 16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71호에선 숀 마이클스가 일본으로 가서 특별 출연을 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보도했다.차후 도장의 졸업생들을 보낼 수 있도록 커넥션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1999년 12월 4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78호에선 ECW 섹션의 메인 헤드라인이 바로 숀 마이클스가 ECW와 세그먼트를 함께 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였다. 숀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저스틴 크레디블과도 ECW에 등장하는 것에 대해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며, 본인이 특별 심판으로 참전했던 FMW의 10주년 기념 대회에선 레이븐과 타미 드리머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 FMW 10주년 기념 대회에는 ECW의 레이븐과 타미 드리머, 볼즈 마허니 그리고 재즈가 참전했다) 그리고 숀 마이클스는 두 선수에게 만약 자신의 훈련생들도 참전할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ECW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PWTorch 측은 본인의 소스를 인용하며 이미 숀 마이클스가 어떻게 출연할 것인지에 대해 동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숀 마이클스의 ECW 출연에 관하여 WWF측과 ECW측의 공식적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 1999년 12월 11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79호에선 숀 마이클스가 12월 7일에 ECW 관계자와 대화를 나눌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숀 마이클스가 여전히 WWF와 계약 상태였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 1999년 12월 18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80호에선 2000년 1월에 있을 ECW의 Guilty as Charged 에서 숀 마이클스가 출연하게 될 경우 대진표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암시했다. 또한, 숀 마이클스와 레베카 사이의 첫 아이가 4주 안으로 태어나기에, 아마도 이것이 스토리 라인에 영향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 1999년 12월 25일에 발행된 PWTorch 뉴스레터 581호에선 ECW 섹션에서 숀 마이클스가 ECW PPV에 등장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고 보도되었다. 아이가 곧 태어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숀 마이클스는 3월에 있을 ECW PPV에 출연할 수도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3월에 레슬매니아를 개최할 WWF가 허락할지는 의문이다.


- 결과적으로 숀 마이클스의 ECW 참전은 실현되지 않았다.




- 이번 편을 준비하면서 필자가 데이브 멜처에게 숀 마이클스가 정말 ECW에 출연할 의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WWF를 압박하기 위한 단순한 연막작전이었는지 물어보았는데, 멜처는 필자에게 자기는 숀 마이클스의 본심이 당시에 뭐였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 당시엔 이런 루머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참고해주었으면 한다.






다니엘슨이 FMW에 참전했을 시기엔 본인이 알고 있었던 하드코어 단체로 유명했던 FMW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DirecTV가 일본 진출을 하는 과정에서 채널의 킬러 콘텐츠로 FMW를 선택했고, 3년 3억 엔이라는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여 TV 방영권을 얻게 된 이후 FMW는 노골적인 엔터테인먼트 노선을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1999년 5월 이후엔 개밥 경기 같은 기믹 매치들은 물론, AV 배우였던 쵸코볼 무카이나 AV 여배우인 와카나 세나가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FMW가 추구하려고 했던 방향성은 단체의 메인 스토리였던 하야부사와 Mr. 간노스케의 대립에서도 잘 드러났다. 프로 레슬링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기믹 매치 중 하나로 꼽히는 항문 폭파 데스 매치에서 패한 하야부사의 항문에 폭죽을 꽂아 Mr. 간노스케가 그대로 불을 붙이는 엽기적인 장면도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바로 잡을 점은 다니엘 브라이언은 자서전을 통해 이러한 비슷한 장면이 숀 마이클스가 특별 심판을 맡았던 경기에서 나온 줄 알고 오해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야부사 vs. Mr. 간노스케의 항문 폭파 데스매치는 약 한 달여 전인 1999년 10월 29일에 코라쿠엔 홀에서 열렸다. 다니엘슨에 의하면 이 장면을 보았던 숀 마이클스의 표정이 압권이었고, FMW의 한 관계자들 역시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에겐 저런 장면을 연출할 일이 없으니 괜찮다고 말해주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경기 전 프로모 영상을 보고 잘못 기억한 것으로 보인다.






충격과 공포의 장면..








FMW 의 10주년 대회가 끝난 후 숀 마이클스는 바로 샌 안토니오로 돌아갔지만,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는 일본에 남게 되었다. 프로 레슬링 훈련은 FMW 도장에서 재개했다. 다니엘슨에 의하면 스쿼트와 푸쉬업 등의 운동은 물론, 체인 레슬링을 위주로 훈련을 했다고 한다. 도장에선 당연히 질서가 존재했는데, 다나카 마사토를 비롯해 당시 FMW에서 활동하던 일본 선수들은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에게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 등 여러 질서를 가르쳐 주었다.


두 선수가 당시 10일간 계속되었던 투어에 참가하면서 받았던 액수는 $1,000 이었다. 최저 임금을 받으며 워낙 힘들게 살아왔던 다니엘슨에겐 다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크게 보였던 액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던 다니엘슨에게 있어 문화적 차이로 인해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한번은 랜스 케이드와 다니엘슨이 묶고 있었던 호텔의 변기에는 비대가 달려 있었는데, 비대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비대를 끄는 방법을 몰라 화장실 바닥이 비대에서 나오는 물로 가득 찬 적도 있었다. 다니엘슨에게 있어 이때가 비대를 처음으로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가 묶었던 호텔마다 모두 비대가 달린 것은 아니었다. 때론 소규모의 작은 도시에서 경기를 가질때면 수세식 변기가 달린 호텔도 있었다.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는 수세식 변기를 'Japanese toilets'' 라고 불렀다. 처음엔 그 누구도 이들에게 어떻게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용법을 알고 난 뒤에도 수세식 변기를 이용하기는 쉽지 않았는지, 때론 옷에 똥물이 튈까 봐 상,하의를 다 벗고 대변을 보았다. 한번은 FMW 선수들이 만으로 18세밖에 되지 않았던 두 선수를 비키니만 입은 여자들이 있는 클럽으로 데려가 두 사람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다니엘슨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음식이었다. 일본에선 선수들이 다니엘슨과 케이드를 주로 스시집에 데려가서 끼를 해결하곤 했는데, 다니엘슨은 물고기를 생으로 먹을 때마다 뱃속이 안 좋았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일본 음식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당시엔 쉽게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다니엘슨은 10일 동안 이어졌던 투어에서 총 7번의 경기를 가졌다. 경기마다 랜스 케이드와 함께 팀을 이루어 FMW의 선수들과 태그팀 매치로 맞붙었지만, 다니엘슨은 늘 일본 선수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슨이 경기 도중 처음으로 기절을 했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훗날 다니엘슨은 RAW에서 은퇴를 발표하면서 처음 프로 레슬링을 시작한 지 5개월채 안되어 3번의 뇌진탕을 겪은 바 있었다고 밝힌 바 있었는데, 이때 겪었던 뇌진탕 역시 포함될 것이다.


태그팀 매치 도중 이단 로프에서 문설트를 시도했지만, 발목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컨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먼저 부딪쳤다. 잠시 동안 기절을 했지만, 이내 정신을 되찾고 경기를 강행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뭘 해야 할지도 몰라 랜스 케이드에게 태그를 해야 할 시점에서 상대방에게 뜬끔없이 드래곤 스프렉스를 작렬시킨 뒤에 랜스 케이드와 태그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니엘슨의 인디 시절 피니셔인 캐틀 뮤틸레이션은 초창기 시절때부터 시전하던 기술이었다.




처음으로 기술이 작렬되던 순간




투어의 마지막 두 대회는 일본의 전설적인 코라쿠엔 홀에서 열렸다. 일본 프로 레슬링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프로 레슬러의 꿈을 키웠던 다니엘슨에게 있어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다니엘슨은 투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기로 마지막 대회에 있었던 태그팀 매치를 꼽았는데, 이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스프링보드 섬머설트 다이브를 시전했다. 훗날 이 기술은 다니엘슨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기술이 되었고, 인디 시절 다니엘슨이 남겼던 수많은 명경기에서 한 번씩 시전되었던 기술이기도 했다.


투어가 끝난 뒤, FMW 측은 다니엘슨과 랜스 케이드에게 감사하며 돈을 현찰로 지불했다. 꼭 다시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2014년 5월에 일본의 도쿄 스포츠에서 기획한 한 기사를 보면, FMW 시절 다니엘슨의 모습을 본 기자들이 숀 마이클스로부터 기초를 배운 만큼 품위있는 경기 운영을 보였다며 극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 것일까. 하지만 일본의 현지 기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았음에도 불구, FMW측은 훗날 다니엘슨이 아닌 랜스 케이드만을 요구하여 재참전 시켰다. 랜스 케이드의 신체적인 조건이 좋았기에 다니엘슨보다 일본 관중들에게 어필하기가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슨은 이때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았다.




브라이언 다니엘슨: 내 체격을 고려했을 때, 만약 내가 성공적인 레슬러가 되고 싶다면, 난 훨씬 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PS- 말머리를 달지 않고 글을 올릴까 하다가, 남자의 항문에 특정 물체가 삽입되어있는 사진(...)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혐짤포함] 이라는 말머리를 따로 넣게 되었습니다. (...)



PS2- 어느덧 연재 시작한지 2주차에 접어 들었습니다. 그냥 대니얼 브라이언의 자서전만 요약해서 썼다면 진작에 완결했을텐데, 편이 늘어날수록 글 쓰는 시간보단 자료 리서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ㅜㅜ 가끔가다 대니얼 브라이언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자잘한 부분들이 옛날에 대니얼 브라이언이 했던 인터뷰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는건 덤이죠. :'(



그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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