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4년 3월 8일, 사울 '카넬로' 알바레스는 알프레도 앙굴로와 치른 PPV 시합을 마치고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장에 리처드 셰퍼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카넬로가 한창 질의응답을 하던 도중, 한 남자가 갑작스레 자리를 박차고 단상으로 올라가 카넬로의 마이크를 빼앗아서 기자들을 술렁이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에리슬란디 라라였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시합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나랑 언제쯤 싸울 거야?" 그리고 약 1개월 후, 두 선수의 시합이 7월 12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치러지는 쇼타임 PPV 이벤트로 확정됩니다.


이 둘의 매치업이 확정된 후 양쪽 캠프에서 오가는 설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경기 전의 여흥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구경거리였죠. 카넬로가 아직 -154파운드에서 한창 전적을 쌓던 시기부터 꾸준히 그를 도발한 라라 쪽은 말할 필요도 없고, 카넬로 캠프 또한 그간 참고 있던 것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거칠게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리슬란디 라라:

"골든 보이는 어떻게든 카넬로를 우리로부터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앙굴로는 게이 같은 놈, 카넬로는 X같은 X자식이다."

"카넬로는 자기 밑천이 나에게 까발려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카넬로는 쉬운 상대다. 전혀 문제 없다."

"나는 카넬로가 못하는 것도 전부 할 수 있다."

"카넬로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과대평가된 '거품'이다."

"나는 쿠바에서 최고의 훈련을 받았지만 카넬로는 멕시코 길바닥에서 자라났다."

"카넬로의 커리어는 고르고 고른 상대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나는 카넬로보다 150%는 더 뛰어난 선수다!"

"카넬로에게 쿠바 복싱 학교 특별 강의를 들려주지!"


카넬로 알바레스:

"(라라의 '멕시코 길바닥' 발언에 대해) 라라는 나뿐만이 아니라 멕시코를 모욕했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라라가 좋은 선수라서 이 시합을 추진한 것은 아니다. 놈을 닥치게 해 주기 위해서다."

"라라는 수도 없이 개소리를 지껄였다. 이제 놈의 입을 닥치게 해 줄 차례다!"

"라라가 단상으로 올라온 것이 굉장히 거슬렸다. 난 그런 짓을 하는 부류의 선수가 아니다."

"녀석은 너무 많이 떠들었고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라라가 KO를 당하지 않으려면 하늘이 도와야 할 것이다."

"라라의 챔피언 벨트는 잠정 타이틀에 불과하다. 그런 건 관심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놈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 뿐이다."

"쿠바가 뛰어난 복서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멕시칸 스타일이 쿠바보다 낫다!"






쿠바 망명자 출신의 에리슬란디 라라는 뛰어난 아마추어 경력과 망명 후 프로 데뷔까지의 극적인 과정, 탁월한 실력으로 하드코어 팬들 사이에서 이전부터 존재감을 알린 선수지만 팬 베이스의 부재로 인해 프로모터들의 외면을 받아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라가 택한 생존 전략이 바로 트래쉬 토크와 SNS였는데요. 플로이드 메이웨더, 게나디 골로프킨 등 -147파운드부터 -154파운드까지 본인 체급 근처의 이름난 강자들은 모조리 도발하는 겁없는 모습으로 인해 라라는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라라가 일찌기 목표로 삼고 계속해서 도발하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 상대가 바로 카넬로 알바레스였습니다. 십대의 어린 나이로 일찌감치 프로에 데뷔해서 이십대 초반에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준수한 외모의 멕시칸 백인 복서 카넬로는 캐쉬 카우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스페인어권인 라틴아메리카 팬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해 온 라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 바로 카넬로였던 것이죠. 


겁없이 날뛰는 것처럼 보이는 라라의 머릿속은 계산으로 가득했고, 메이웨더전을 통해 카넬로의 상업적 가치가 최고조에 이르게 되자 마침내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트래쉬 토크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 다음 자신이 선택받기 좋은 적절한 시기를 골라서 카넬로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든 상황을 연출한 라라의 계산은 적중했고 결국 카넬로는 라라를 선택하게 됩니다. 마침내 카넬로가 라라를 택하게 되자 라라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넬로는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어!"


이번 이벤트의 프로모터인 골든 보이 프로모션의 사장 오스카 데 라 호야 또한 이 시합이 그루지 매치(grudge match: 상대간의 개인적 감정이 결부된 시합)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데요. 최근의 인터뷰에서도 데 라 호야는 "라라가 지금까지 한 트래쉬 토크가 카넬로를 격앙시키고 있으며, 이 시합을 개인 감정이 들어간 싸움으로 고조시키고 있다."라면서 분위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라라의 부족한 팬 베이스와 인지도를 트래쉬 토크와 감정 싸움이라는 조미료로 메꾸려는 의도겠죠 ^^;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멕시칸 팬들을 의식한 두 선수의 태도인데요. 이미 자신이 멕시칸 팬의 지지를 결집시키고 그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의식하고 있는 카넬로는 위에서 설명한 설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라라가 멕시칸 복싱과 멕시코를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딱히 멕시코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보이지 않는 발언까지도 '라라는 멕시코를 모욕했다'라고 반응할 정도로 말이죠 ^^;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라라는 스페인어권 국가 팬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데요. 이는 멕시칸 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SNS를 통해 멕시코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라라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명절인 신코 데 마요(Cinco de Mayo)를 축하하는 메세지를 올리는가 하면, 브라질vs멕시코의 월드컵 경기에서도 멕시코 대표팀을 응원하는 메세지를 올려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복싱계에서 멕시칸 팬들이 지닌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죠. (참고로 카넬로는 내년 신코 데 마요 시즌에 시합을 치르는 것이 거의 확실한 상태입니다)


카넬로 vs 라라는 6월 초 리처드 셰퍼가 골든 보이 CEO직 사임 의사를 표한 후 처음으로 치르는 대형 PPV 이벤트입니다. 셰퍼의 사임 이후 셰퍼의 사람들까지 줄줄이 단체를 떠나면서 사실상 단체의 주요 임무를 거의 혼자서 총괄하고 있는 데 라 호야 입장에서는 첫 시험 무대와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전부터 프로모터로서의 능력은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고, 게다가 최근 대니 가르시아와 라몬트 피터슨을 두고 실망스런 매치업을 추진한 일 때문에 비판을 받은 데 라 호야 입장에서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이벤트이기도 하죠.






카넬로 입장에서도 이번 라라전은 굉장히 중요한 시험 무대입니다. 카넬로는 메이웨더전을 앞두고 특유의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모습을 어필하면서 엄청난 기대를 모았고 그 기대는 역대 최고의 흥행이라는 결과로 나왔지만 정작 시합 퍼포먼스는 기대 이하였죠. 이 시합은 사람들에게 카넬로의 완패라는 인식을 심어줬고 카넬로가 과연 차기 복싱 아이콘에 걸맞는 기량을 갖췄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생기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카넬로에게 있어서 메이웨더전 직후에 튠업 매치였던 앙굴로를 거치고 바로 라라를 상대하게 되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를 지닌 선택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메이웨더전에 이어서 사실상 2연패로 대중의 뇌리에 인식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실제로 데 라 호야는 최근의 인터뷰를 통해 "카넬로의 다음 상대로 라라는 그리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지만 카넬로가 강력하게 원해서 택하게 되었다. 프로모터로서 자기 선수가 가장 어려운 시합을 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라며 라라가 굉장히 힘든 상대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발언에는 비즈니스적 계산도 들어가 있겠죠)


라라가 카넬로에게 있어서 어려운 상대인 이유는 물론 기량 그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라라가 스텝이 활발하고 박스아웃에 능한 사우스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합니다. 오스틴 트라웃은 2013년에 카넬로와 라라를 모두 상대한 적이 있는데, 카넬로는 라라와 스타일상 유사한 점이 많은 사우스포 트라웃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라라는 훨씬 압도적인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트라웃은 최근 인터뷰에서 라라가 카넬로를 아웃박스하며 우세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판정으로 가면 라라가 힘들 것이라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죠.


카넬로 vs 라라는 시합 그 자체로도 당사자들에게 중요하지만 복싱계 전체에 있어서 시합 이후의 향방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넬로가 라라를 상대로 승리할 경우 가장 유력한 다음 상대 중 하나는 미구엘 코토입니다. 코토는 최근 세르히오 마르티네스를 제압하고 WBO&링 매거진 미들급 챔프에 등극하면서 그 가치가 최고조에 오른 상태인데요. 2013년에 이미 성사될 뻔 했다가 무산된 이 둘의 경기는 다시금 양 측의 프로모터들에게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카넬로에게 있어서도 코토는 흥행 면에서나, -160파운드 제패라는 점에서나 여러모로 구미가 당길 법한 상대이고 이 시합 이후로는 메이웨더 2차전까지도 노려볼 수 있게 됩니다. 카넬로vs라라는 그만큼 이벤트 자체를 넘어서, 복싱계 전체에 큰 나비효과를 불러올 만한 중대한 이벤트입니다.



글을 마치며...


카넬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역 파이터 중 하나지만, 라라 또한 개인적으로 참 애정이 많이 가는 선수입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본인이 지닌 팬 베이스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 자신의 흥행력을 올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서 결국 대어를 낚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정말 크게 와닿게 만드는 선수였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기예르모 리곤도가 그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로모터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게 된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죠.'Fans No.1'을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신의 흥행력을 끌어올리고 팬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쿠바 복서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데 라 호야가 말한 대로, 라라처럼 기량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흥행 면에서는 크게 이득이 되지 않는 까다로운 상대를 만나는 것은 누구나 꺼려하는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넬로는 라라가 '미끼를 던졌다'라고 표현한 상황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파이터다운 패기와 배짱이 바로 카넬로 알바레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죠.


스포츠를 즐기면서 한 선수만 좋아하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러다 보면 좋아하는 선수끼리 맞부딪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나오게 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이번 카넬로vs라라가 딱 그런 경우인데요. 누가 이기건 저에게는 달콤씁쓸한 결말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체급에서 언젠가 만나게 될 상대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 흥미롭기도 하네요.


어제 일자로 두 선수와 양측의 캠프는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말을 맞이할 때가 드디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을 맞이하면 또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상황들이 기다려지네요.



"라라의 무서운 점 중 하나는 그의 스피드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점은 그의 배고픔이다. 그는 승리에 목말라 있고, 명예에 목말라 있고, 명성에 목말라 있다." - 호세 '체포' 레이노소, 카넬로의 트레이너


"나는 파퀴아오나 메이웨더처럼 내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 나는 가장 어렵고 위협적인 상대를 고른다." - 카넬로 알바레스




by Canelo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