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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코발레프와 링 위의 사망 사고, 그리고 그 이후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힐 의도가 있었습니까?"


"형사님,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게 제 직업입니다."


- 슈거 레이 로빈슨, 상대 선수의 사망 사건 직후 경찰 진술에서.







세르게이 코발레프는 극심한 빈곤과 폭력에 둘러싸인 거친 환경에서 자라났다. 여섯 식구에게는 너무 좁았던 세 칸짜리 아파트에서 살던 코발레프에게 있어서 가난은 익숙한 것이었다. 코발레프의 매니저, 에지스 클리마스는 코발레프가 들려준 이야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냉장고에 계란 두세 개라도 있으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 하더군요." 코발레프는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 창문닦이, 주유소 직원 등 고된 일을 해야만 했다.


러시아 빈민가에서 자라난 청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코발레프 또한 싸움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환경에서 자라났다. 길을 가다가 처음 보는 사람과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서로를 밀치고 싸우는 광경이 일상이었다. 코발레프는 십대 시절 깡패들이 한 남자를 집단 구타해서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르는 광경도 목격했다고 회상했다.


1994년, 11세의 코발레프는 친구의 권유를 통해 처음으로 복싱을 시작하게 되었고, 3년 후인 1997년에는 아마추어 선수 데뷔를 하게 된다. 아마추어 시절 코발레프가 복싱과 함께 병행한 생계 유지 수단 또한 싸움이었다. 선창가에서 일하던 십대 시절의 코발레프는 우연히 눈에 들어 술집 경호원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코발레프는 만 15세의 어린 나이로 시니어 레벨에서 경쟁하며 주목받았고, 내셔널 챔피언십과 군 복싱 대회 대표팀 등을 거치며 탄탄한 아마추어 커리어를 쌓게 된다.


에지스 클리마스는 현재 코발레프를 비롯하여 바실리 로마첸코, 올렉산드르 흐보즈딕, 예브게니 그라도비치 등 수많은 동유럽-러시아 파이터들을 맡은 영향력 있는 복싱 매니저다. 클리마스가 코발레프를 만난 것은 아직 그가 매니저 일을 겸업으로 하던 시절인 2009년, 에반더 홀리필드의 트레이너로 유명한 오랜 친구 돈 터너와 코발레프의 친구 아나톨리 루빈치코프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내셔널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온 코발레프는 이들의 소개를 통해 클리마스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프로 데뷔를 결정한다.


코발레프의 재능과 진지한 자세, 과묵함에 반한 클리마스와 터너는 코발레프를 미국으로 데려오지만 그의 프로 생활 초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라이트헤비급은 별로 주목받는 체급이 아니었고, 영향력 있는 프로모션의 계약이나 거래를 쉽게 따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탑랭크, 골든 보이, 루 디벨라, 개리 쇼…온갖 이름있는 프로모션의 대회에 세르게이를 출장시켰지만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했죠. 당시만 해도 세르게이의 경기는 대회의 맨 앞에 잡혔고, 경기가 시작되면 1라운드가 끝나기도 전에 KO시켜버려서 뭔가 보여줄 틈도 없었던 거에요.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적당한 상대를 잡아주지 못하다보니 별 볼일 없는 상대만 잡아나가는 날이 이어졌죠. 저는 세르게이가 체육관에서 보여주는 진지한 자세와 열정에 반했지만 프로모터에게는 그런 것을 보여줄 수가 없었죠. 결국 주목받게 될 때까지 기록을 쌓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코발레프의 재능을 진심으로 신뢰했던 클리마스는 그의 훈련비와 생계에 필요한 돈을 지원해주면서 코발레프를 떠받쳤고, 프로 데뷔 후 2년 반 동안 코발레프는 16전 전승 15KO라는 인상적인 기록을 남긴다.


2011년 가을, 코발레프는 글로버 영이라는 선수와 치른 경기에서 파울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면서 무승부로 끝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재경기를 시도해도 거부만 당하는 와중에 클리마스는 한 러시아 프로모터의 연락을 받게 된다. 12월에 러시아에서 루슬란 프로보드니코브의 경기가 있는데, 언더카드에 코발레프를 출전시킬 생각이 있냐는 것이었다. 클리마스와 코발레프는 즉시 제안을 승낙했다. 코발레프의 상대로 지명된 선수는 로만 시마코프였다.







코발레프는 시마코프를 아마추어 시절 토너먼트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고 한다. 경기가 성사된 직후 코발레프는 클리마스에게 시마코프가 펀치가 센 뛰어난 선수이며 좋은 경기가 될 것 같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코발레프의 말대로, 시마코프는 20전이 넘는 프로 전적에서 단 1패만을 기록한 수준 있는 상대였다. 프로 데뷔 후 인상적인 전적을 쌓아나가는 중이었던 코발레프는 점점 여러 프로모터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좀처럼 실력에 걸맞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던 당시의 코발레프에게 있어서 시마코프와의 경기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었다.


운명의 날인 2011년 12월 5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클리마스와 당시 코발레프의 트레이너였던 아벨 산체스는 계체 당일 시마코프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아보였다고 회상했다. 다음날 경기에 나설 선수치고는 안색이 너무 창백했고, 도저히 경기에 나설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 선수는 계체를 통과했고, 결국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시마코프가 좋은 전적을 지닌 터프한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코발레프는 1라운드부터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코발레프는 원하는 모든 종류의 펀치로 시마코프를 가격했고, 시마코프가 빠져나오기 위해 움직여도 코발레프는 특유의 스텝과 링 커팅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펀치를 맞아도 시마코프는 끝없이 버티고 또 버텼다.


3라운드가 되자 코발레프의 머리 속에는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 친구 대체 언제까지 버틸 생각이지? 분명 데미지를 입었을 텐데. 경기가 시작한 지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코발레프는 하도 때리다 못해 양 주먹에서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 이걸 계속하는 거지? 어서 경기를 멈춰.' 엄청나게 세게, 셀 수 없을 정도로 주먹을 날렸죠. 심지어 주먹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4라운드가 끝난 후, 코발레프는 링사이드에 앉아 있던 클리마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지스, 내 펀치가 죄다 맞고 있는데 이 친구 대체 언제까지 버틸 생각인지 모르겠어. 이 경기 중단은 안 되나?" 그러나 레퍼리나 링 닥터, 아니면 상대방 코너에서 경기 중단을 선언할 때까지 코발레프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7라운드 만에 경기는 TKO로 끝나게 되는데, 시마코프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시마코프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로프에 매달렸고, 곧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게 된다. 의료진이 다가와 그의 상태를 점검하고 의식을 되찾게 하려 했지만 그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들것에 실려나갔다. 시마코프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클리마스는 라커룸에서 승리를 축하하던 코발레프와 그의 팀원들에게 그의 상황을 전해 주게 된다. "심각한 상황이야. 그 친구 아직도 의식을 못 찾았어. 상태를 보고 왔는데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어."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클리마스는 시마코프의 트레이너를 통해, 코발레프는 지역 병원의 친구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마코프의 상태를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코발레프의 아내 나탈리아는 경기 후 며칠 동안 남편이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계속해서 경기가 녹화된 테이프만 돌려 봤다고 회상했다. 코발레프 부부는 교회에서 시마코프가 의식을 되찾길 바라며 기도했지만,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경기 3일 후, 2011년 12월 8일, 로만 시마코프가 의학적으로 완전히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클리마스는 시마코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코발레프의 집에 전화했지만, 몇 번이나 전화를 건 끝에 코발레프가 겨우 수화기를 들었다고 한다. 클리마스가 시마코프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코발레프는 전화 벨을 듣고 이미 그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클리마스와 코발레프는 수화기를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몇 분 동안 계속해서 오열했다고 회상했다.


코발레프는 유족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하고 싶어했지만 클리마스는 그를 말렸다. 코발레프를 말리고 대신 전화한 클리마스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클리마스는 시마코프의 부친과 한 통화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부친은 울분을 참지 못하더군요. 우리를 살인자라고 부르며,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소리쳤죠.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세르게이는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고 유족을 만날 작정이었는데, 저는 그럴 생각도 하지 말라며 그를 말렸죠."


코발레프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정리한 글을 올리며 조의를 표하는 것밖에 없었다. "제 매니저가 유족에게 전화했지만 그분들은 저희와 대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저는 그 심경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까요. 참담한 비극입니다. 제 매니저가 그의 가족 분들에게 비행기 표를 보내서 로만이 입원한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안타깝게도 가족 분들이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만일 제가 다시 링에 오른다면 저는 그 경기를 로만에게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경기에서 얻은 모든 수익은 유족에게 전달할 생각입니다. 날 용서하게, 로만, 명복을 비네."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TV 방송과 신문에서는 경기를 진작에 중단시키지 않은 주최 측 대신 코발레프에게 책임을 돌렸고, 심지어 코발레프가 글러브에 무언가 위험한 물체를 집어넣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의혹까지 보도할 정도였다. 분노한 시마코프의 유족은 코발레프를 경찰에 고발했고, 코발레프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고 심문을 받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현재 이 사건의 조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이며, 심지어 클리마스는 불과 8개월 전에도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블로그에 남긴 글의 말미에 남긴 의미심장한 말처럼('만일 제가 다시 링에 오른다면'), 코발레프는 복싱을 그만두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나탈리아는 사고 이후 한 달 가까이 코발레프가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코발레프는 사고 이후 가족과 친지로부터 수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당시의 한 달 동안 자신이 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한 달 동안 완전히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였던 것이다.


코발레프의 부모는 아들이 복싱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코발레프의 아내 나탈리아 또한 이전부터 복싱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남편이 복싱을 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마코프의 사망 사고가 터진 후,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남편의 안전을 심각하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발레프는 복싱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코발레프는 1~2개월 간격으로 활발하게 경기를 치른 선수였지만, 시마코프와의 경기 이후 그가 링 위에 다시 오른 것은 약 7개월이 지난 후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코발레프는 캐시 두바가 이끄는 메이저 프로모션 메인 이벤츠와 계약했고, 마침내 HBO와 독점 계약을 체결하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코발레프는 살아있는 전설 버나드 합킨스와 치른 통합 타이틀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라이트헤비급 통합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사실상 해당 체급의 최고 선수로 공인받게 된다.


코발레프가 링 위에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유명해질수록 계속해서 뒤를 따라다녔다. 정말로 사람을 죽게 만든 복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미국 대중이 러시아 출신 스포츠 선수 하면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록키 4>의 이반 드라고와 같은 무시무시한 냉혈한의 이미지를 겹쳐 보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현재 코발레프의 트레이너인 존 데이빗 잭슨마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세르게이는 링 위에서 사람을 죽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그게 그의 직업이오. 버나드 합킨스가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한들 그가 망설일 일은 없소."


2015년과 2016년, 코발레프는 라이트헤비급 전 챔피언 장 파스칼과 두 번에 걸쳐 경기를 치른다. 당시 코발레프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메세지를 SNS에 올렸다는 의혹을 받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경기 전 마인드 게임으로 유명한 파스칼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1차전에서는 강화된 약물 검사를 요구하며 논란을 일으켰던 파스칼은 2차전 직전에는 코발레프의 인종 차별 문제를 거론하며 그를 흔들기 시작했다.


코발레프는 파스칼 2차전에서 매우 감정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경기 결과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는 파스칼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7라운드가 끝난 후 파스칼은 멘탈이 완전히 무너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고, 결국 8라운드가 시작되지 못하고 경기는 거기에서 중단된다. 코발레프는 경기 후 "파스칼을 조금이라도 더 패주기 위해 일부러 경기를 오래 끌었다."라는 말을 하며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링에서 사람을 죽게 만든 적이 있는 선수가 그 사태에 대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이 있냐는 것이었다. 2011년의 사고는 여전히 코발레프를 떠나지 않고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따라다니고 있었다.


지난 7월 11일, 코발레프는 시마코프와의 경기 이후 무려 4년 반 만에 고국 러시아에서 경기를 치렀다. 경기 장소는 다름아닌 바로 그 장소, 2011년 시마코프와 경기했던 예카테린부르그 DIV 호텔이었다. 경기 장소를 이 곳으로 잡은 것은 코발레프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미래를 마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코발레프는 이 경기를 통해 받게 될 1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모두 시마코프의 유족에게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코발레프는 지난 달, 시마코프를 상대했던 그 경기장에서 치를 경기를 앞두고 처음으로 심경을 고백하는 인터뷰를 했다. 저널리스트 크리스 매닉스와의 인터뷰에서, 코발레프는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유족을 만나게 되면) 뭐라고 할까요...어렵네요.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저 인사하고, 죄송하다고 말해야죠. 저를 위해,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도 계속 싸워나가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죠."





Roman Simakov


(1984/03/28 ~ 2011/12/08)






레퍼런스: 크리스 매닉스의 세르게이 코발레프 인터뷰, Vringe 코발레프 블로그, 메인 이벤츠의 에지스 클리마스 인터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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