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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


A와 B라는 두 복서가 있다고 가정하자.


- B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체급 월장 행진으로 인해 놀라움과 함께 저것이 과연 약물의 도움 없이 가능하냐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 두 선수의 경기가 성사되기 직전, A측은 경기 당일까지 혈액과 소변 샘플을 채취할 수 있는 USADA 주관 불시 약물 검사를 제안했다.


- B측은 처음에는 약물 의혹을 부인하며 얼마든지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며칠 후 B측은 선수 B가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고, 경기를 얼마 안 남긴 상태에서 피를 뽑는 주사를 맞으면 경기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미신 때문에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요구를 거부하며 오직 경기 전 30일까지만 피를 뽑을 수 있는 검사만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선수 B는 약 반년 전 치른 경기에서 경기 24일 전에 혈액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 A측이 선수 B의 약물 의혹을 계속해서 제기하자 결국 B측은 A측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 중재인이 주도한 마지막 협상에서 A측은 타협안으로 경기 전 14일까지 제한이 걸린 약물 검사를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협상이 무산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십니까?





아직도 답을 내리기 어려우시다면 이후 발생한 사실 몇 가지 더 추가.


- B측이 A측의 약물 검사 제안을 완전히 승낙하기까지는 무려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 B측은 이후 C라는 다른 선수와 시합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자신들이 C측에게 약물 의혹을 뒤집어씌웠다. 허나, 이들은 의혹 제기만을 했을 뿐 추가적인 약물 검사는 제의하지 않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A와 B의 첫 협상이 무산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십니까?










2009년 복싱계의 모든 관심사는 메이웨더 vs. 파퀴아오의 성사 여부에 쏠려 있었다. 오스카 델 라 호야와 리키 해튼을 꺾고 복싱계의 정점에서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메이웨더가 떠난 사이 기적적인 월장 행진을 선보이며 복싱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매니 파퀴아오. 진정한 복싱계 최고의 자리를 가리게 될 메이웨더 vs. 파퀴아오를 원하는 여론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양 측이 정식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파퀴아오 측에서는 탑랭크 프로모션의 수장 밥 애럼이 협상의 대표를 맡았고, 메이웨더 측에서는 메이웨더 프로모션과 협력 관계인 골든 보이 프로모션의 CEO 리처드 셰퍼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2009년 12월 2일, ESPN의 댄 라파엘이 자체 소스를 통해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이 합의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계약의 세부 사항들을 공개했다. 경기 일자는 2010년 3월 13일, 체급은 웰터급 한계체중, HBO의 PPV 방송을 통해 중계될 예정이고 경기 장소로는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와 댈러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 뉴올리언스 수퍼돔이 거론되고 있었다. 초기 보도에서 라파엘은 파퀴아오가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보도했지만 몇 시간 후 파퀴아오 측이 아직 몇 가지 해결할 문제가 남았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곧 기사는 정정되었다.


2009년 12월 11일, 골든 보이 프로모션은 탑랭크 프로모션에 8페이지 분량의 계약서를 전달한다. 메이웨더는 선수 명칭 순서, 소개 순서, 계체 측정식 입장 순서, 라커룸 선택권에서 우선권을 차지했고, 파퀴아오 측의 프로모션인 탑랭크는 프로모션 명칭 순서에서 우선권을 차지했다. 양쪽이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경기는 금방이라도 성사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특이한 조항 하나가 명시되어 있었다. 양 선수가 올림픽 기준의 약물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파퀴아오의 급격한 증량과 월장으로 인해 그의 약물 사용을 의심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상태였고, 이 문제로 인해 양 캠프가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인 적도 있을 정도였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 과정에서 이 의혹은 양측의 설전과 더불어 점점 큰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골든 보이 프로모션이 탑랭크 프로모션 측에 계약서 완성본을 전달한 그 날, 파퀴아오의 트레이너 프레디 로치는 파퀴아오 측이 올림픽 기준 약물 검사를 전혀 문제 없이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레디 로치 - "협상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어. 셰퍼와 그쪽 사람들이 무언가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군. 그들은 올림픽 기준 약물 검사를 원한다고 했어. 그래서 난 전혀 문제 없으니 뭐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대답했지. 우리가 승낙한 다음부터 또 다시 겁먹어서 도망가고 있나봐."


12월 13일, 파퀴아오의 어드바이저 마이클 콘츠 또한 올림픽 기준 약물 검사는 전혀 문제거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마이클 콘츠 - "(약물 검사에 대한) 우리 반응은 이랬어. '그래서 어쩌라구?' 매니가 금지된 약물이나 그 비슷한 것에 손도 안 댔다는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지. 매니는 이 문제를 신경도 안 쓰고 있어. 난 지금 매니와 함께 있는데 매니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그냥 농담거리야. 웃고 넘길 수준의 문제밖에 안 돼."


이때까지만 해도 강화된 약물 검사에 대한 파퀴아오 측의 응답은 이와 같았다. - 전혀 문제 없으니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러나 며칠 후인 12월 21일, 이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보도되었다. 골든 보이 프로모션 CEO 리처드 셰퍼는 파퀴아오 측은 메이웨더 측이 제안한 올림픽 기준 약물 검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리처드 셰퍼 - "토드 드뵈프(탑랭크 프로모션 사장)의 말에 따르면 파퀴아오는 혈액 샘플 채취를 꺼려하고 있으며 시합이 가까워진 시점에서 피를 뽑는 주사를 맞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파퀴아오는 오직 경기 전 기자회견과 경기 직후에만 피를 뽑는 것을 원한다고 그러더군."


"파퀴아오 측의 대리인으로부터 이와 같은 답변을 들은 것은 매우 불운한 일이다. 더구나 양 측은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시합과 관련된 여러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해 왔다. 팀 메이웨더는 매니 파퀴아오와 같은 엘리트 선수가 플로이드는 물론이고 랜스 암스트롱, 마이클 펠프스,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등의 유명 선수들이 모두 동의한 약물 검사 과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고 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 "파퀴아오가 혈액 샘플 채취를 거부한 건 이해가 가. 솔직히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그렇지만 이런 큰 영향력을 지닌 시합에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가장 높은 수준의 스포츠맨쉽을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난 이미 검사에 동의했는데 매니가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이래서는 경기 당일 링에 올라갈 때 과연 이게 공정한 승부인지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어. 부디 이 상황이 의사전달 과정의 착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매니가 마음을 바꿔서 검사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파퀴아오 측과 이들의 대리인으로서 협상을 진행하던 탑랭크 측은 파퀴아오가 올림픽 기준 약물 검사를 거부한 이유를 밝혔다. 헌데 그 이유는 너무나 믿기지 않는 것이었고,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파퀴아오는 주사 바늘을 두려워하고 경기 직전 피를 뽑는 것이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혈액 샘플 채취는 오직 경기 후에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또한 파퀴아오의 프로모터 밥 애럼은 혈액 검사가 어떠한 약물 사용의 증거도 밝혀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콘츠 - "매니는 경기 직후에는 혈액 검사를 할 의향이 있다. 그들이 원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매니는 경기를 앞두고 피를 뽑는 것이 자신에게 해롭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대답은 간단하고 명백하다. 매니는 절대 경기 전에는 피를 뽑지 않을 것이다."


밥 애럼 - "우리는 훈련 중에 매니의 피를 뽑아가는 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멍청한 짓이다. 전 세계 그 어떤 의사에게 물어봐도 이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매니는 연초에 혈액 검사를 받을 의향이 있으며 소변 샘플은 24시간 어느 때에 와서 채취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하지만 혈액 검사는 아무것도 잡아낼 수 없고 매니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밥 애럼은 언론을 통해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은 무산되었으며 파퀴아오는 다른 상대를 물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애럼은 메이웨더 측이 파퀴아오가 피를 뽑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검사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밥 애럼 -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메이웨더는 매니를 상대할 마음이 없고 이 모든 것은 매니에 대한 음해 공작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메이웨더 측에 소변 샘플 채취는 언제든지 해도 좋으며, 혈액 샘플 채취는 기자회견 이전과 경기 직후에 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메이웨더는 계체 측정식까지도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 메이웨더는 매니가 피를 뽑는 것을 무서워하고 그것이 힘을 뺏어간다고 믿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건 그저 음해공작일 뿐이고, 시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징표일 뿐이다."


얼마 후 밥 애럼은 기자회견을 통해 약물 검사 문제에 대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소변 샘플은 어느 때건 채취해도 상관없지만, 혈액 검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세 번의 시기에만 받길 원하며 시합 당일 30일 전까지만 피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애럼은 USADA가 날짜의 제한 없이 피를 뽑아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정했기 때문에 이들의 검사는 받을 수 없으며, 24시간의 데드라인을 설정하고 만약 시간 내에 이 제안을 승낙하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밥 애럼 - "혈액 검사는 총 세 번을 받도록 하겠다. 1월에 한 번, 시합 30일 전(2월 13일 이전까지)에 한 번, 그리고 경기 직후. 어디서 의견이 갈리는지 제대로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이건 검사를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검사를 진행하고 일정을 잡는가, 그것이 문제다. USADA가 이 검사를 진행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제안한 검사 일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USADA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그들은 계체 측정식 당일까지도 원할 때마다 불시에 와서 혈액 샘플을 채취할 수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


2009년 협상 당시 파퀴아오 측이 메이웨더 측의 요구를 거부한 이유의 핵심은 이 두 가지이다.


1. 파퀴아오는 피를 뽑는 것이 컨디션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메이웨더 측은 이를 알고 음해 공작을 펼치는 것이다.

2. 혈액 검사와 날짜의 제한 없는 불시 검사는 무의미하며, USADA 이외의 어떤 검사 기관도 혈액 검사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사실일까.


1. - 개인이 갖고 있는 심리적 문제와 공포심은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으며, 파퀴아오 또한 주사 바늘과 피를 뽑는 것에 대해 병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이를 무조건 거짓말로 단정짓고 비난할 수는 없다. 허나 경기 전의 혈액 샘플 채취가 컨디션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많은 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핑 테스트를 위한 혈액 샘플은 보통 5ml 튜브 1~2개 분량을 채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정도는 1~2시간 안에 체내에서 회복되는 수준이다. 만약 정말로 파퀴아오가 이러한 미신을 믿고 있었다면, 파퀴아오의 측근과 프로모터들은 선수를 잘 설득해서 혈액 검사를 왜 반드시 받아야 하는지 이해시키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파퀴아오에게 쏟아지는 의혹을 증폭시키고 그의 명성을 실추시킨 것은 파퀴아오 측의 잘못된 대응의 결과일 뿐, 약물 검사를 요구한 메이웨더 측을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


2. - 명백한 거짓말. EPO와 HGH는 혈액 검사가 아니면 검출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더구나 HGH는 반감기가 매우 짧기 때문에 당시 도입된 기술로는 HGH를 투여한지 24시간 이내에 샘플을 채취하지 않으면 검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HGH는 비교적 최근에야 투여한지 시일이 지난 후에도 검출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마저도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않은 상태다. 날짜의 제한 없는 불시 혈액 검사가 아니면 사실상 잡아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음은 세계 반도핑 기구(WADA)가 밝힌 HGH 도핑에 관한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 선수들은 시합 기간에는 약물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HGH 검사는 검사 시기를 통보하지 않고 불시에 검사하는 지능형 검사를 기반으로 비시합 기간에 우선하여 시행되어야만 한다. … 국제적인 전문가의 대다수는 혈액 매트릭스가 HGH를 검출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입을 모은다. HGH는 소변 샘플에서 매우 적게 검출되는데, 혈액에서 검출되는 양의 1% 미만에 불과하다. … 소변 샘플을 기반으로 한 HGH 검출 방법의 개발 시도는 현재까지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다."


물론 파퀴아오는 선수 경력에서 한 번도 금지 약물이 적발된 적이 없으며 그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검사를 강요받아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분명 파퀴아오에게 문제는 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것은 파퀴아오가 아닌 당시의 검사 체계 그 자체였다. 주 체육위원회는 현재까지도 충분한 검사를 주관하고 진행할 만한 예산과 인력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며 해당 사건이 현재진행형이었던 2009년과 2010년에는 더욱 상황이 열악한 상태였다. 약물 검사 문제를 주 체육위원회 소관에 맡기자고 한 파퀴아오 측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이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최선의 방안은 자발적으로 강화된 약물 검사를 시행하는 것밖에 없다.


공인된 반도핑 단체가 금지약물 사용을 잡아내기 위해 설정한 최선의 가이드라인을 거부한 채 자기네 마음대로 검사 일정을 짜고 이 날에만 혈액 샘플 채취를 받겠다고 요구한 파퀴아오 측의 행동은 혈액 검사를 시행하는 이유의 상당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을까?


2014년 6월 28일, 7월 5일 개최될 UFC 175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차엘 소넨이 약물 검사에서 HGH와 EPO가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소넨의 혈액과 소변 샘플을 채취한 일자는 6월 5일, 경기가 시작하기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파퀴아오 측의 석연찮은 행동으로 인한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었고, 메이웨더 측과 골든 보이 프로모션 측에서도 점점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골든 보이 프로모션의 사장 오스카 델 라 호야 또한 12월 23일 블로그를 통해 파퀴아오가 혈액 샘플 채취를 거부하는 이유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우며, 파퀴아오 측이 이러한 태도를 고수할 경우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오스카 델 라 호야 - "주사 바늘이 두렵고 피를 뽑는 것이 힘을 앗아간다는 이유로 4천만 달러가 걸린 시합을 거부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파퀴아오는 몸 곳곳에 문신을 새겼다. 그런데도 주사 바늘이 두렵다고? 이제 그에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난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파퀴아오의 펀치력이 모슬리, 바르가스의 펀치력과 맞먹는 수준이네.' (파퀴아오가 정말로 약물을 사용했는지) 예스냐 노냐,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않겠다. 단지 대중이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대체 왜 검사를 거부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이건 전혀 좋지 못한 상황이다. 이건 그냥 피를 조금 뽑는 것 뿐이다. 숨길 게 없다면 검사를 받길 바란다."


수 개월 후의 일이지만 골든 보이 프로모션과 협력 관계인 리키 해튼 또한 파퀴아오의 갑작스런 증량에 대해 의문을 표한 적이 있다.


리키 해튼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르케스처럼 작은 선수에게 다운당하던 파퀴아오가 갑자기 오스카 델 라 호야와 미겔 코토같은 선수들을 KO시켰다. 이들은 체급 내에서도 힘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말이다. 좀 이상한 일이긴 하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결국 12월 26일, 파퀴아오는 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스테로이드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직접 성명을 밝혔으며, 자신에게 의혹을 제기한 이들에게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매니 파퀴아오 - "모두에게 확실히 말하건대 나는 어떠한 종류의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내가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오직 끝없는 노력과 링 안에서의 흘린 피땀의 결실이다. 나는 스테로이드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신에 대한 경외심이 지난 몇 년간 나의 모든 승리와 안전을 지켜준 가장 큰 요인이다."


밥 애럼 - "매니는 대단히 화가 났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매니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매니는 이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HBO측은 우리에게 누군가의 중재를 받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매니에게 사슬을 채우려는 메이웨더의 행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파퀴아오가 혈액 샘플 채취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한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주장이 하루아침에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사실인 것으로 보였다. 한 미디어에서는 2005년 파퀴아오가 방송에 출연해서 남긴 인터뷰 영상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링크)


파퀴아오가 이 방송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NSAC에서는 2005년 에릭 모랄레스 1차전을 앞두고 혈액 샘플을 채취했으나 병원측이 파퀴아오의 혈액 샘플을 분실했다는 이유 때문에 계체 측정 전날 파퀴아오의 피를 한번 더 뽑아갔다고 한다. 체중을 맞추기 위해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를 뽑은 파퀴아오는 현기증과 두통을 느꼈고, 이러한 컨디션 저하가 모랄레스 1차전의 패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파퀴아오가 모랄레스 1차전에서 당한 패배가 정말 계체 전날에 시행한 혈액 검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며,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허나 이 영상을 통해 2005년에 촬영한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파퀴아오가 경기 직전 피를 뽑는 것을 꺼린다는 주장이 하루아침에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입증된 것으로 보였다.





(사진 - 리키 해튼과의 시합을 24일 앞두고 피를 뽑는 매니 파퀴아오)


12월 28일,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증거가 하나 발견되었다. 약 반년 전인 5월 2일 개최된 파퀴아오 vs. 리키 해튼 경기를 앞두고 파퀴아오가 건강 검진을 위해 피를 뽑는 모습이 24/7의 녹화본에 찍혔던 것이다. HBO 측의 확인 결과 해당 장면은 경기 전 24일에 촬영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 전 30일 이후에는 피를 뽑으면 경기력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는 파퀴아오 측의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파퀴아오가 계속해서 혈액 검사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한 의혹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밥 애럼은 상황에 따라 파퀴아오를 설득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밥 애럼 - "매니가 해튼전을 앞두고 혈액 검사를 받았다고 한 것은 좋은 지적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나도 매니에게 무언가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쪽 사람들이 와서 증거를 보여주면 나 또한 '이것 봐, 해튼전을 앞두고 혈액 검사를 받았지만 별 문제 없이 2라운드만에 이 친구를 때려눕혔잖아.'라고 매니를 설득할 것이다. 매니가 어떻게 할 것 같냐고? 매니가 내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뭐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우선 메이웨더 측이 매니가 24/7 영상에서 경기 전에 혈액 검사를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와 함께 정식으로 제안을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곧 파퀴아오와 탑랭크 측이 태도를 바꾸게 만드는 문제가 또 하나 불거져나오게 되었다. 2008년 치러질 예정이었던 잽 주다 vs. 셰인 모슬리를 앞두고 탑랭크 소속의 잽 주다 측이 추가적인 약물 검사를 제안했지만 모슬리가 속한 골든 보이 측에서는 이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모슬리는 BALCO 스캔들 당시 금지 물질을 구입한 주요 고객 명단에 이름이 올라온 인물이었다. 불과 며칠 전 파퀴아오의 펀치력이 바르가스, 모슬리와 비슷했다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던 오스카 델 라 호야 또한 메이웨더 vs. 마르케스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파퀴아오는 굉장히 빠르긴 하지만 펀치력이 그다지 세지는 않았다."라고 발언했던 것이 드러나며 망신을 당했다. 밥 애럼은 골든 보이의 이중적 행보를 문제삼으며 절대 검사를 강요받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12월 30일, 파퀴아오 측이 마침내 네바다 주 미 연방 지방 법원에 정식으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피고소인의 명단에는 플로이드 메이웨더 부자, 로저 메이웨더, 메이웨더 프로모션, 오스카 델 라 호야, 리처드 셰퍼의 이름이 올라왔다. 이들이 파퀴아오가 PED를 사용했다는 거짓 주장과 음해로 인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협상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2010년 1월 7일, 결국 양 측은 중재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전에도 탑랭크와 골든 보이의 중재자 역을 맡은 경험이 있는 은퇴한 연방 정부 판사 출신의 대니얼 와인스틴이 중재 역을 맡은 상태에서 1월 19일 다시 협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협상에서도 양 측은 혈액 검사 문제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메이웨더 측은 타협안으로 경기 전 14일까지 검사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파퀴아오 측의 대표로 나선 밥 애럼은 해튼전의 혈액 검사일인 경기 전 24일을 고수했다. 결국 양 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협상은 무산되었다. 메이웨더는 셰인 모슬리를, 파퀴아오는 조슈아 클로티를 상대했다. 이후 이 둘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5년의 세월이 걸렸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의 약물 문제에 관한 와전된 소문 중 하나는 파퀴아오가 처음에는 약물 검사 요구를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승낙했는데 메이웨더 측이 다른 조건을 내세우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가 공식 성사된 후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링크), 국내에서는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 과정을 제대로 다룬 언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협상 과정의 많은 내용들이 와전되어서 돌아다녔는데, 이 소문 또한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사실, 파퀴아오 측이 메이웨더 측의 약물 검사 요구를 완전하게 승낙하기까지는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2011년에 경기 전 14일까지 혈액 검사를 받는 것에 대해 동의하긴 했으나, 날짜 제한이 없는 테스트에 동의한 것은 3년 가량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는 2009년과 2015년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협상의 형태를 갖고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동안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피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09년의 협상으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도  파퀴아오 측의 태도는 여전했다. 2011년 7월, 밥 애럼은 파퀴아오 측이 날짜의 제한 없는 무작위 약물 검사에 동의했지만 USADA가 아닌 다른 기관에서 시행하는 것을 원한다고 인터뷰했다. 그러나 파퀴아오의 어드바이저 마이클 콘츠는 바로 다음날 밥 애럼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밝혔다. 파퀴아오는 경기 직전에 피를 뽑는 것을 여전히 꺼려하고, 이 때문에 날짜의 제한 없는 혈액 검사는 절대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콘츠(파퀴아오의 어드바이저) - "그(메이웨더)가 말하는 약물 검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가 경기 당일까지 혈액 샘플 채취가 가능한 검사를 요구한다면 시합이 성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양쪽이 모두 검사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 경기 14일 전까지는 무작위 검사를 받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는 경기 당일에 절대 검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경기 5~7일 전에는 혈액 샘플을 채취할 수 있냐고? 글쎄, 매니와 이야기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우리는 경기 당일에는 어떠한 방식의 혈액 검사도 받을 생각이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매니의 개인적인 믿음 때문이고, 나 또한 모랄레스전 당시 이를 겪었다. 무랏 무하마드(파퀴아오의 전 프로모터)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때 혈액 검사에 문제가 생겼고 다시 피를 뽑아야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경기 2~3일 전 정도였다."


"그러한 믿음이 사실이건 아니건(weather it's true or not), 바늘을 꽂고 혈액을 채취하는 행위가 몸과 힘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을 한번 갖게 되면 이는 계속 마음 속에 들어차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결국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그러한 믿음이 존재하면 결국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플로이드도 마찬가지다. 그의 머리 속에는 매니가 무언가(약물)를 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있고 그것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매니와 주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매니는 주사 맞는 것을 싫어한다. 첫 번째 협상 당시 우리는 매니가 주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계속해서 설명했고, 모랄레스전을 그 사례로 들었다."


파퀴아오가 마침내 약물 검사에 관한 메이웨더의 요구 사항을 승낙한다고 발표한 시점은 2012년 9월이었다. ESPN에 출연한 파퀴아오는 메이웨더가 요구한 약물 검사를 받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그의 요구를 모두 승낙한다고 밝혔다. 2009년의 협상 이후 무려 3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무려 3년을 끌어온 문제였지만 그런 것 치고는 거부한 이유가 너무나 어처구니없었고, 너무나 허탈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승낙할 거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오랜 시간을 질질 끌었던 것이란 말인가.




- Part 2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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