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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퀴아오와 약물 검사 문제 ① : 2009년의 협상 과정, 그리고 약물 의혹

위의 글에 이어서.








다시 말하지만 파퀴아오가 금지약물 사용자라고 단정지을 생각은 없다. 파퀴아오는 평소에도 징크스나 미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멘탈적인 면에서 극도로 예민한 선수들이 미신이나 징크스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례는 여러 스포츠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파퀴아오는 2005년에 한 인터뷰에서 이미 혈액 검사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경기 직전 피를 뽑는 것을 꺼린다는 주장이 약물 검사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상: 파퀴아오가 2005년 인터뷰에서 모랄레스 1차전 당시 경기 전 혈액 검사로 인해 컨디션에 이상을 느꼈다고 발언하고 있음)



허나 문제는 약물 검사가 선수의 개인적인 미신만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고, 파퀴아오 측의 대응은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스포츠계의 약물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고, 이 때문에 경기 당일까지 소변, 혈액 샘플이 채취 가능한 랜덤 테스트는 언젠가 스포츠계에서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단지 누가 먼저 총대를 매느냐가 문제였고, 메이웨더가 그 역할을 했을 뿐이다.


파퀴아오와 탑랭크 측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메이웨더의 제안을 단순히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정치적 공세로만 해석하고, 약물 검사가 갖는 중대한 의미와 이후의 판도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파퀴아오의 주장이 진실이고, 그가 약물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물론 메이웨더가 정말 복싱계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순수한 선의로 약물 검사를 제안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메이웨더의 제안은 향후 스포츠계의 약물 문제에 대한 판도를 고려해 볼 때 단순히 정치적 수단으로 치부하고 거절할 수 없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겨우 미신 때문에 거절한다는 일은 파퀴아오에 대한 의혹을 더욱 짙어지게 할 뿐이다. 파퀴아오의 측근들과 탑랭크 프로모션은 파퀴아오의 대리인으로서 그에게 이 사실을 납득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의혹을 점점 불어나게 하는 식의 대응만을 하기 급급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팬들만이 아니라 미국 현지의 복싱 저널리스트들과 업계 관계자들조차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복싱계는 약물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중이었고, 이 때문에 사태가 현재진행형이었던 2009년과 2010년에는 미디어와 팬들 모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엇이 옳은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메이웨더의 강화된 약물 검사 요구는 과연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파퀴아오 측이 약물 검사를 거부한 이유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복싱계 외부의 주요 미디어는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이 무산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이 무산된 후 대다수의 주요 미디어는 이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이 약물 문제에서 합의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파퀴아오 측은 경기 전날까지 시행하는 혈액 검사가 자신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미 여러 스포츠 업계에서는 약물 문제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BALCO 스캔들과 함께 사이클,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계에서 약물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기존의 약물 검사는 숙련된 약물 디자이너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었다. HGH(성장호르몬)는 반감기가 짧기 때문에 불시 혈액 검사가 아니면 사실상 잡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HGH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도핑에 사용되고 있었지만 NFL 노조는 계속해서 HGH 검사를 거부하며 의혹을 사고 있었다(이후 2013년에 비로소 HGH 검사를 받아들인다고 밝힘).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주니어는 2010년 경기 후 이뇨제 성분이 검출되어 7개월 출장 정지를 받았으며, 2012년 세르히오 마르티네스를 상대한 직후에는 마리화나 성분이 검출되면서 다시 한 번 9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다. 차베스 주니어는 커리어에서 치른 경기 중 상당수를 약물 검사가 매우 취약한 텍사스 주에서 치렀다.


199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호엘 카사마요르는 2011년 티모시 브래들리와 치른 경기 직후 치른 검사에서 마리화나 성분이 검출되었다.


2013년 5월, 메이웨더 vs. 게레로의 언더카드에 출전한 제이-리온 러브가 약물 검사에서 감량에 주로 사용되는 이뇨제 계열 물질이 적발되었다.


브랜든 리오스는 2013년 매니 파퀴아오를 상대한 직후 VADA 검사에서 흥분제 성분인 메칠헥산아민이 검출되었다. 리오스의 소속 팀인 로버트 가르시아 체육관의 컨디셔닝 코치는 알렉스 아리자였다. 아리자는 한때 프레디 로치의 팀에서 일하면서 파퀴아오의 전무후무한 증량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노니토 도나이레는 연중 계속해서 시행하는 자발적인 약물 검사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으며, 안드레 워드를 비롯한 여러 동료 선수들도 이러한 행보에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여러 선수들이 VADA와 USADA 등의 기관이 주관하는 추가적 약물 검사를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MMA계는 어떨까.


2014년 6월, 반더레이 실바가 NSAC의 검사단이 자신의 체육관에 샘플 채취를 위해 찾아오자 체육관 밖으로 도망쳐서 잠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큰 파장을 불러 왔다. 반더레이 실바가 UFC로 오기 전 활동하던 주 무대였던 PRIDE는 코카인, 마리화나 등의 향락성 약물만을 검사할 뿐 스테로이드 등의 PED는 검사하지 않았던 단체로 악명 높았다. 반더레이 실바는 이후 NSAC로부터 무기한 출장 정지 징계를 받으며 사실상 북미 무대에서 매장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에서 최초로 보도하며 비웃던 반더레이 실바의 라이벌 차엘 소넨 또한 며칠 후 호르몬 계열 물질인 클로미펜과 HCG가 적발되었다. 소넨은 이 물질들이 자신의 성기능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것이며 NSAC에 이를 사전 신고하려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며칠 후 소넨이 치른 다른 검사 결과에서 HGH와 EPO가 적발되었고,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소넨은 선수 생활 은퇴와 함께 UFC 관련 방송직의 계약을 모두 해지하게 되었다.


이 사태는 MMA를 넘어 여러 업계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그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널리 퍼져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검사를 통해 잡아내기는 매우 어려웠던 EPO와 HGH 등이 실제로 검사에서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파퀴아오가 수 년 동안 거부했던 불시 혈액 검사를 통해서 말이다. 소넨의 경기 일자는 7월 5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HGH와 EPO가 검출된 검사 일자는 정확히 30일 전인 6월 5일이었다. 시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혈액 검사를 통해 HGH와 EPO 등의 검출하기 어려운 물질이 적발된 구체적인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근 몇 년간 계속해서 외면하려고 노력했던 약물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자 결국 UFC는 점진적으로 자체 약물 검사를 강화할 예정이며, 최종적으로는 비시합 기간에도 모든 UFC 선수들을 대상으로 자체 약물 검사를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2014년 8월 경기 후 혈액 검사에서 HGH가 적발된 쿵 리가 검사 절차의 문제를 이유로 들며 이의를 제기하자 분노한 데이나 화이트는 자체 검사 계획을 모두 철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체 약물 검사? 기껏 돈 들여서 하니까 쿵 리 그놈은 오히려 지가 억울하다며 방귀 뀐 놈이 성을 냈잖아! 이제 그딴거 필요 없어!"


그러나 이듬해 벌어지게 될 사태는 더욱 거대한 재앙이었다. 근래 들어 UFC의 최대 PPV 이벤트의 헤드라인을 맡은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의 코카인 사용이 대회 전 랜덤 테스트를 통해 적발되었고, 다음 달에는 UFC가 MMA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하던 앤더슨 실바에게서 스테로이드 계열 물질이 검출된 것이다. MMA계뿐만 아니라 북미 스포츠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기껏 돈 써봤자 욕만 먹는 자체 약물 검사가 뭐가 필요하냐고 윽박지르던 데이나 화이트는 결국 기자회견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강화된 자체 약물 검사 시행 계획을 발표해야만 했다.



기한과 시일이 정해진 테스트에서 적발되는 선수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검사 시일의 제한이 없는 랜덤 테스트는 언젠가 반드시 시행되어야 했을 일이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떠한 선수도 약물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설령 그 선수가 존 존스이거나, 앤더슨 실바이거나, 심지어 메이웨더나 파퀴아오라도 말이다. 약물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현 상황의 제도적,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강화되고 제한 없는 약물 검사를 시행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강화된 약물 검사를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메이웨더를 협상을 망친 주범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다고 한들 메이웨더의 요구는 엄연히 스포츠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를 석연찮은 이유로 오랫동안 거부한 파퀴아오에게 약물 의혹이 따라다니는 것은 결국 파퀴아오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파퀴아오 측이 언제나 의혹의 대상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파퀴아오 측 또한 상대방에게 약물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


2011년 파퀴아오 vs. 마르케스 3차전 당시, 경기 전까지만 해도 라이트급에서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은 38세의 노장 마르케스가 이미 수퍼웰터급까지 제패한 32세의 파퀴아오에게 상대가 안 될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알렉스 아리자는 파퀴아오의 1R KO승을 예측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뜻밖의 접전이었고, 비록 파퀴아오가 판정승을 거두긴 했지만 마르케스의 승리를 채점한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예상을 뒤엎은 마르케스의 선전으로 인해 파퀴아오 vs. 마르케스는 결국 4차전까지 가게 되었다.


대다수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가 나왔지만 대중과 미디어가 마르케스에게 보낸 것은 찬사가 아닌 폄하와 의혹의 눈길이었다. 한 필리핀 미디어에서 마르케스가 경기 중 파퀴아오의 발을 밟는 장면을 편집하여 웹사이트에 올려서 논란이 됐다가 프레디 로치가 오소독스와 사우스포의 경기에서 앞발 포지션 싸움을 하다가 발을 밟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해명하는 해프닝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마르케스의 캠프 또한 의혹의 도마 위에 올랐다. 마르케스의 컨디셔닝 코치 앙헬 에레디아는 올림픽에 출전한 수많은 선수들에게 PED를 공급했던 업계의 유명인사였다. 정황상 분명 의혹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마르케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의심받은 쪽이 할 만한 상식적인 대응을 했다 -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공평하게 양쪽 모두 추가로 자발적인 약물 검사를 받자.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 - "혈액 검사건 올림픽 기준 검사건 상관없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검사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그들(파퀴아오 측)도 똑같이 검사를 받는다면 전혀 문제 없다."


앙헬 에레디아 - "좋다. USADA에 전화해서 검사 일정을 잡아라."


문제는 파퀴아오의 트레이너인 프레디 로치 또한 4차전을 앞두고 이러한 의혹 제기에 가세했다는 점이다. 2년 전에는 약물 의혹을 받자 상대방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증량에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선수에게 증거도 없이 약물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하다니! 코미디같은 일이지만 엄연히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다. 다음은 마르케스 4차전을 일주일 가량 앞둔 상황에서 프레디 로치가 남긴 인터뷰다.

 

프레디 로치 - "마르케스의 몸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라면 그 녀석의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다. 그의 몸집은 더 커지고 체중도 불어났다. 굉장히 의심스럽다."


언론과 팬들이 아닌 상대 선수의 트레이너, 그것도 파퀴아오의 트레이너가 직접 의혹을 제기한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마르케스의 약물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마르케스 측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다.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 - "그런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지난 18년 동안 그런 짓(약물 사용)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약물 검사에서 스테로이드에 양성 반응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앙헬 에레디아는 프레디 로치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할 것을 고려한다고 밝혔다. 2년 전 파퀴아오 측이 의혹을 제기한 메이웨더 측을 고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앙헬 에레디아 - "어제 변호사와 얘기했고 조만간 프레디 로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예정이다. 정식 절차를 진행할 준비는 모두 마쳤다."


물론, 약물에 관한 의혹은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앙헬 에레디아와 같은 전력이 있는 인물을 고용하고 증량에 성공했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 당시와 이 사건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파퀴아오 측은 의혹만을 제기했을 뿐, 어떠한 추가적 약물 검사도 요구하지 않았다.


밥 애럼 - "이번 주에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 어느 쪽도 추가적인 약물 검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추가적인 약물 검사를 요구한다면 나는 주 체육위원회 측에 이를 요청하고 주 체육위원회 측은 자금을 마련해서 경기 전 소변 검사와 혈액 검사 등을 진행한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나에게 이를 요구한 적은 없다."


파퀴아오 vs. 마르케스 4차전은 추가적인 약물 검사 없이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가 주관하는 약물 검사만을 소화했다. 그리고 경기 당일 파퀴아오는 마르케스에게 KO당했다. 주 체육위원회 주관 약물 검사에서는 두 선수 모두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강력한 기준의 약물 검사는 스포츠계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의 의혹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파퀴아오 측은 마르케스 4차전이 끝난 후 그제서야 이를 깨닫고 개선을 시작했다. 탑랭크의 여러 선수들은 VADA가 주관하는 추가 약물 검사를 받고 있었고, 파퀴아오 또한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르케스 4차전 이후 1년 가까이 지난 2013년 11월, 파퀴아오는 재기전에서 브랜든 리오스를 상대했고 경기 후 VADA 검사에서 리오스는 금지 물질이 적발되었다. 마르케스 5차전 또한 VADA가 주관하는 강화된 약물 검사를 전제로 협상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2015년의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 당시에도 파퀴아오 측은 약물 의혹을 어떻게든 씻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이게 되면 5백만 달러의 위약금을 지불하는 조항 삽입을 요구한 것이었다. 메이웨더 측은 이 조항의 삽입을 거절했고, 파퀴아오의 어드바이저 마이클 콘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깨끗한 스포츠를 위한 일인데 왜 이 제안을 거절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여러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렸다.


글쎄, 하지만 과연 이 조항이 과연 실질적인 제재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5백만 달러라는 미묘한 액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메이웨더는 2009년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를 상대할 때에도 한계체중 1파운드를 초과할 때마다 30만 달러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을 비웃듯 한계체중 2파운드를 초과한 몸으로 계체 측정식에 등장했다. 이 때문에 2009년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 당시에는 한계체중 1파운드 초과당 1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위약금 조항을 추가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네바다에서는 약물이 적발되었을 경우,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대진료의 30% 이상의 벌금을 징수하고 있다. 메이웨더 vs. 파퀴아오를 통해 양 선수가 얻게 될 수익은 도합 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 체육위가 징수하는 벌금보다도 훨씬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5백만 달러의 위약금이 과연 현실적인 제재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메이웨더나 파퀴아오처럼 수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스포츠 스타에게서 약물이 적발되는 사태의 후폭풍이 과연 5백만 달러라는 가격표로 수습이 될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메이웨더건 파퀴아오건 현 시점에서 약물이 적발되는 쪽은 X된다. 그 타격에 비하면 5백만 달러의 벌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메이웨더 프로모션의 CEO 레너드 엘러비는 이들의 요구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응답했다. 


레너드 엘러비 - "저 양반들은 약물 검사 탈락에 5백만 달러라는 가격표를 붙이려나 본데, 약물 검사 탈락은 그것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일이라구."


5백만 달러 조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심지어 파퀴아오의 프로모터 밥 애럼조차 이 조항은 전혀 의미가 없다며 메이웨더의 편을 들 정도였다.


밥 애럼 - "터무니없는 소리지. 메이웨더의 말이 맞아. 누군가가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면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가 5백만 달러보다 훨씬 많은 벌금을 징수할텐데 추가적인 조항은 전혀 필요없어. 이 문제 때문에 시합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지도 않을 거야. 이미 양 쪽 모두 계약서에 사인했잖아."


5백만 달러 조항은 정치적인 의도가 너무나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물론 2009년 협상에서 메이웨더 측이 제안한 추가적 약물 검사 또한 협상 막판에 갑작스럽게 요구한 것이었고, 그 이면에 정치적 맥락이 숨겨진 것은 명백했다. 허나 적어도 메이웨더 측의 약물 검사 요구는 스포츠계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양 선수의 수익을 따져봤을 때 새발의 피에 불과한 위약금을 지불하는 조항을 요구하는 것, 그것도 이미 약물 검사에 대한 논의를 마친 시점에서 요구하는 행동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파퀴아오 측이 제시한 5백만 달러 벌금 조항 문제는 그렇게 별 이슈가 되지 못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잊혀졌다.







지금까지 말하고자 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



1. 갑작스럽게 말을 바꿔서 강화된 약물 검사를 거부한 쪽은 파퀴아오 측. 실제로 계약서가 탑랭크 측에 전달된 시기인 12월 중순까지만 해도 파퀴아오의 측근인 프레디 로치와 마이클 콘츠 등은 얼마든지 약물 검사를 원하는 방식대로 수용하겠다고 밝혔으나 이후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경기 전 혈액 샘플 채취는 파퀴아오의 미신과 공포심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함.


2. 피를 뽑는 것이 힘을 앗아간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경기 전 혈액 샘플 채취를 거부한 파퀴아오 측의 행동은 지나치게 황당무계하고 납득하기 어려운데다 과학적인 근거도 부족함. 물론 파퀴아오 측의 주장이 약물 검사를 피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되지만, 미신 운운하는 주장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인 약물 검사를 거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이유임.


3. 혈액 검사에서는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고, 날짜의 제한 없는 불시 검사가 무의미하다는 파퀴아오 측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 HGH 도핑의 경우는 사실상 혈액 검사를 통해서만 검출하는 것이 가능하며, HGH 투여 후 24시간이 지나면 검출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날짜의 제한 없는 불시 혈액 샘플 채취가 최선의 수단임. 게다가 USADA의 가이드라인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임의대로 짠 검사 스케줄을 제안한 파퀴아오 측의 행동은 더욱 의심을 사게 할 만한 대응이었음.


4. 파퀴아오 측이 검사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메이웨더 측이 다른 조건을 내세워서 피했다는 소문 또한 사실과 다름. 파퀴아오 측은 2011년 7월 인터뷰에서 경기 전 14일까지의 검사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경기 당일 검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파퀴아오가 메이웨더 측의 약물 검사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직접 밝힌 시점은 2012년 9월.


5. 약물 문제는 2009년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에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이전부터 심각한 문제였고, 이후 복싱계와 MMA계 등의 상황을 감안할 때 석연찮은 이유로 수 년 동안 메이웨더 측의 요구를 거부한 파퀴아오 측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일. 이후의 약물 적발 사례들을 고려하면 파퀴아오 측이 자체적으로 제시한 약물 검사 일정은 지나치게 헛점투성이였음.


6. 파퀴아오 측은 마르케스 4차전 직전 마르케스의 약물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이 있으며 이 때문에 마르케스 측으로부터 고소까지 당할 뻔한 적이 있음. 그러나 이들은 의혹만 부추겼지 정작 추가적인 약물 검사는 요구하지 않았음.


7. 얼마 전 메이웨더 측에게 약물 검사 탈락시 5백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을 추가하자고 한 파퀴아오 측의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노골적인 정치적 공세에 불과함. 5백만 달러의 벌금은 약물 적발시 주 체육위원회가 부과하는 벌금보다도 훨씬 적으며, 양 선수의 수익과 재산을 감안해도 미미한 수준. 메이웨더건 파퀴아오건 약물이 적발될 경우 입게 될 유무형적 타격은 엄청나며, 이러한 타격에 비해 훨씬 적은 수준인 5백만 달러의 벌금은 제제 효과가 전혀 없는 무의미한 조항. 훨씬 결국 밥 애럼마저 메이웨더의 편을 들자 이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잠해짐.






이 글의 목적은 파퀴아오를 약물 사용자로 단정하고 몰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어제 인터뷰에서 파퀴아오는 메이웨더전 캠프를 시작한 후 총 6회의 검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파퀴아오는 약물 의혹을 벗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간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협상의 약물 문제에 관해서는 사실과 다른 편견이 너무나 많이 퍼져 있었고, 메이웨더 측의 정치적 의도만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정작 파퀴아오 측의 행보가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정당성이 없다는 점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있었다. 약물 검사 문제의 핵심은 메이웨더 측이 먼저 강화된 약물 검사를 제안했으나 파퀴아오 측이 석연찮은 이유로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이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2009년의 협상을 망쳤으며 도망쳤다고 비난받는 쪽이 메이웨더라는 점은 문제가 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는 몇 년 전 HBO의 다큐멘터리에서 자신과 파퀴아오의 협상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 "실제로 발생한 일과는 무관하게 난 이미 비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난 이제 파퀴아오와의 시합을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미 '메이웨더가 시합을 피하고 있다'라며 마음 속에서 결론을 내린 상태다."


적어도 약물 검사 문제에 관해서라면, 파퀴아오 측이 2009년의 협상 이후 수 년간 보여준 태도는 어떠한 정당성도 없었다. 석연찮은 이유로 메이웨더의 약물 검사 요구를 수 년간 거부했고, 나중에는 상대 선수에게 확증도 없이 약물 의혹을 뒤집어씌웠으면서 정작 추가적 약물 검사는 제의하지 않았고, 2015년 협상이 성사된 다음에는 무의미한 부가 조항 요구를 통해 여론몰이를 시도했다. 약물 의혹에 대해서 파퀴아오 측은 다른 그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를 자초한 것은 그들의 잘못된 대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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