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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델 라 호야: 어머니의 약속,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 Part 1





지난 2월 4일은 오스카 델 라 호야의 43번째 생일이었는데, 역시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경력인 올림픽 금메달과 그 배경에 대해 한번쯤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자서전 <American Son>과 다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올림픽 금메달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정리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한 팀이었어. 어머니는 복싱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갔고, 내 경기에 빠짐없이 함께 자리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맞서 싸우셨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커서 무엇을 할까?'라는 주제로 글짓기를 하는 숙제가 있었어. 숙제를 발표하는 날, 다른 아이들은 전부 경찰, 의사, 소방관 같은 직업을 말했지.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가 되어서 금메달을 따겠다'라고 발표했어. 교실은 웃음으로 뒤덮였고, 한 아이는 '야, 오스카. 넌 지금 LA에 있는데 어떻게 금메달을 따러 갈래?'라고 비웃었지. 담임 선생은 내가 숙제를 장난으로 했다고 생각했는지 방과 후에 날 불러서 야단치더군. 난 울먹이면서 이렇게 소리쳤어.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전 정말 금메달을 딸 거라고요!'


만 열두 살이 됐을 때, 나는 올림픽 사진이 찍힌 포스터를 구해서 이렇게 사인을 하고 내 방 벽에 붙여놨지. '오스카 델 라 호야, 199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말야. 지금도 나는 그 포스터를 간직하고 있어.


그 날 이후로 나와 우리 가족의 목표는 정해졌지. '오스카를 올림픽 대표로 만든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내 목표는 곧 우리 어머니의 목표였어. 내가 새벽에 일어나 아침 4시 반에 러닝을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일어나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지어주셨지.


내 아마추어 커리어가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우리 지역에서도 점점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지. 한 번은 지역 신문에 내 이름이 처음 실린 적이 있는데, 사진도 긴 이야기도 없이 그저 내가 어느 대회 토너먼트에 출전해서 누구를 이겼다, 누구를 KO시켰다 정도의 내용밖에 없었지만 마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실린 것처럼 짜릿했어. 나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그 신문을 보여드렸고 굉장히 기뻐하셨지. 그렇지만 그 신문은 영어로 쓰여 있었는데 어머니는 영어를 읽을 줄 모르셨다는 점이 조금 안타까웠어.


열일곱 살 때의 어느 날이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거실에서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날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거야. 마치 날 끌어안으며 힘을 얻으려는 것처럼 말이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니 어머니는 대답 대신 당신의 등에 크림을 좀 발라달라고 하셨지. 그런데 어머니의 등에 손을 대니 글쎄,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거야. 어머니의 등이 온통 그런 걸로 뒤덮여 있었지. 놀라서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날 다시 한 번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해주셨어. '얘야, 엄마 암에 걸렸단다.' 살면서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적은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단 한번도 없었어.


나는 어머니의 병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어. 어머니는 당신이 암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철저히 숨기고 계셨던 거지. 어머니는 머리가 빠지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모자와 가발을 쓰고 다녔어.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의사의 소견도 낙관적이지 않았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계속 병원에 계셨고, 난 매일같이 병원을 찾아가서 어머니를 만났어. 그런데 어머니의 병세가 너무 심해져서 한 번은 날 알아보지도 못하더라고. 내가 병실에 들어오니까 주변에 있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묻는 거야. '누가 왔어?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저에요, 어머니 아들이라고요!'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병실을 뛰쳐나와서 울음을 터뜨렸지. 어머니의 병세는 날로 악화됐고 당연히 정신도 맑지 않은 상태였어.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지. 병실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날 알아보신 어머니는 날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지자 복싱도 계속 할 수가 없었어. 올림픽이 채 2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도저히 그런 기분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


하루는 어머니의 병실에서 오랜만에 웃음을 지으며 대여섯 시간을 함께 즐겁게 보내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왼손 약지에 평소에 끼고 다니던 결혼 반지가 아닌 다른 반지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 내가 1989년 내셔널 골든글러브에서 우승하고 받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챔피언 반지였어.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전국 대회 규모의 우승이었는데, 어머니는 마치 세계 챔피언 벨트처럼 기뻐하셨지.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어머니가 계속 살아계셔서 내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6체급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더욱 큰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라고 말이야.


어머니가 그 반지를 손에 끼고 계셨다는 사실이 기쁘긴 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복싱을 접었고 훈련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어. 아픈 어머니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복싱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지만 어머니는 날 타이르며 말씀하셨어. '복싱을 그만두면 안돼. 올림픽은 너와 나, 우리 모두의 꿈이잖니? 내가 함께 있지 못하더라도 네가 올림픽에 나갈 수 있길 바란다.' 그 말을 듣자 마치 가슴을 무언가로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지. '오스카, 강해져야 한다. 날 위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렴.'


나는 어머니와 약속을 한 바로 다음 날 다시 운동을 시작했지.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 병원에 와 보니 로비와 엘리베이터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곧장 병실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지. 우리 어머니, 세실리아 곤살레스 델 라 호야가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나신 거였어. 1990년 10월 28일,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지.


내가 살면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눈물 단 한 방울. 고작 그것이었지만 아직도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어. 물론 아버지는 어머니와 25년간 함께 하셨고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지 하지만 아버지의 세대는 강해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세대였고 가족에게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분이거든. 아직도 아버지의 그때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몇 주 동안은 복싱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러다가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머리 속에 스쳐지나갔지.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마치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어.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지. '어머니를 위해 다시 복싱을 시작해야 돼.'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날 응원하고 힘을 북돋아주신 거야.


아드레날린이 내 몸을 뒤덮었고, 지난 몇 달 동안 날 짓눌렀던 절망감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힘이 되살아났지.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으면서 생긴 분노와 무력감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어.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와서 체육관까지 9km나 되는 거리를 냅다 뛰어 갔어. 마치 체육관에 들어가서 글러브만 끼면 그 누구와도 스파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


체육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루디 자발라와 함께 링 위에 올라섰어. 자발라는 나중에 제법 좋은 프로 경력을 쌓은 선수가 됐지만, 그날 나를 막을 수는 없었어. 마치 내 몸에 무언가 깃든 것 같은 느낌이었지. 내 안의 모든 분노와 절망감이 날아간 듯한 기분이었어. 공이 울린 후에도 주먹을 멈추지 않아서 트레이너들이 소리치며 겨우 말릴 정도였지. 그저 멈추고 싶지 않았어. 눈물이 터져나올 때까지 계속하고 싶었지.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복싱을 시작했어.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지만 어머니의 묘를 찾는 것은 빼먹지 않았어. 매일같이 어머니의 묘를 찾았고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있기도 했지. 어머니의 묘 옆에 누워서 말을 거는 것이 전부였지만 마치 어머니가 내 옆에서 '넌 할 수 있어'라고 대답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졌지.


캘리포니아 린우드에서 열린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하게 됐어. 당시 나는 16세 이상 선수 부문에 참가했는데, 그 말은 곧 16세가 아닌 25세나 30세 선수들을 상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지. 그런 상황이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프로 선수들을 상대로 쌓은 나이를 초월한 스파링 경험이 있었지. 결국 나는 그날 내가 상대한 네다섯 명의 선수들을 KO시켰고, 유일하게 KO당하지 않은 선수도 링 위에서 날 피하고 도망다니기 바빴어. 그 이후로 나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위치한 올림픽 트레이닝 센터에 발을 들이게 됐지.


그때를 기점으로 내 트레이너들도 계속 바뀌기 시작했어. 나는 우리 동네 체육관을 나와서 8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폴 곤살레스를 키워낸 트레이너 알 스탠키에게 훈련받기 시작했어. 스탠키는 뛰어난 트레이너였지만 알콜 중독 문제 때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사람이었어. 게다가 미래의 올림픽 스타를 키워낸다는 말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고 다니자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었어.


결국 1991년에 스탠키와 결별하고 1991년부터 로버트 알카사르와 함께 훈련하기 시작했어. 로버트와 우리 아버지는 에어컨과 히터 정비사로 함께 일하는 사이였고 둘 다 복싱 선수였기 때문에 복싱 이야기를 하면서 금방 친해졌는데 나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아버지는 직장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에게 아들의 훈련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마침내 로버트가 내 경력의 키를 잡게 되었지.


로버트는 내 아마추어 전국대회 경력의 연이은 성공에서 함께 했는데, 1989년 골든 글러브 -119파운드 부문에서 우승한 후(어머니에게 반지를 드린 그 대회), 1990년 전미 아마추어 선수권 -125파운드 부문 우승, 1990년 굿윌 대회 우승, 1991년 전미 아마추어 선수권 -132파운드 부문 우승까지 거머쥐게 되었지. 난 1987년부터 공식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어. 마르코 루돌프라는 독일 선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나는 1991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마추어 세계선수권에서 마르코 루돌프를 처음 상대했어. 루돌프는 빠르고 민첩한데다 유럽 선수답게 점수 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어. 잽싸게 파고들어 원투를 치면 다시 빠져나가고, 그러다 다시 들어와서 날렵하게 치고 빠졌지. 난 온종일 녀석을 쫓아다녔지만 한 번도 잡질 못했고, 결국 17-13으로 판정패했지.


엄청난 충격이었어. 난 아마추어 228전 중에서 단 5번밖에 패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패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 게다가 이 경기는 올림픽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지. 그 경기가 끝난 후 대회가 끝날 때까지 호텔 숙소에 계속 쳐박혀 있었어. 대회는 그 경기 이후로 2주간 이어졌지만 나는 그저 내 안의 세계에 홀로 갇혀 있었지. 그 어떤 것도 패배의 씁쓸함을 떨쳐내지 못했어. 내 경력에서 최악의 순간 중 하나였지. 당시 내 코치였던 팻 내피가 문 앞에서 좀 나와보라고 소리쳤지만 대답도 안 할 정도였어.


그때 나는 현실을 대하기에는 너무 좌절한 상태였어. 당시 나는 미국 대표팀의 총아였고 가장 유력한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는데 다른 동료들이 채 몸을 풀기도 전에 일찌감치 탈락해버려서 더 좌절했지. 시드니에는 내 연고가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집에 돌아가서 내가 졌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 특히 아버지가 뭐라 반응할지 너무 걱정했지. 결국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내가 졌다는 소식이 퍼진 이후로는 시드니를 떠날 때까지 줄창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지만.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 마르코 루돌프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지. 하지만 어머니와 한 약속도 잊지 않았어.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기운을 되찾고 패배의 후유증을 떨쳐낼 수 있었어. 마침내 나는 연승 끝에서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파트리스 브룩스를 꺾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지. 마침내 해낸 거야.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올림픽행 티켓을 따낸 거지.


하지만 기뻐하는 와중에도 이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최종 목표의 첫 걸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됐어."



(파트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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