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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로마첸코 vs. 니콜라스 월터스의 성사 배경




지난 2월, 탑랭크 프로모션의 수장 밥 애럼은 인터뷰를 통해 중대한 소식을 밝혔다. 사실상 페더급의 최강자 결정전이 될 바실리 로마첸코와 니콜라스 월터스의 경기가 슈퍼페더급(-130lbs)에서 성사 직전 단계에 있으며, 방송사와의 협상 및 세부 사항만 해결된다면 모든 문제는 끝날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로마첸코와 월터스 모두 탑랭크와 계약한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의 성사는 큰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이 경기의 성사에 발목을 잡았다. 바로 HBO의 스포츠 부문 예산 문제였다. 지난 몇 년간 HBO는 스포츠 부문에서 대대적인 예산 감축을 시행했다. 특히 올해에는 거의 작년의 1/6에 달하는 큰 금액의 예산을 삭감할 정도였는데, 이 예산 감축이 불러온 여파는 치명적이었다. 예전이라면 무료 방송에 편성되었을 경기가 PPV로 올라가거나(크로포드 vs. 포스톨), 아예 인가조차 받기 힘들었을 수준의 경기가 정규 프로그램에 편성되거나(코발레프 vs. 칠렘바, 워드 vs. 브란드), 좋은 경기가 성사되지 못하고 날아가는 일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로마첸코 vs. 월터스 또한 그런 경기들 중 하나였다. HBO의 대대적인 예산 감축으로 인해 탑랭크는 로마첸코와 월터스 양 측을 모두 만족시킬 만큼 큰 돈을 끌어낼 수 없었고, 월터스 측은 이에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큰 경기를 성사시키길 원했던 로마첸코는 만약 월터스가 자신을 상대로 승리한다면 자기 몫의 대진료 30만 달러를 월터스에게 양보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조건까지 공개적으로 제시했지만 협상은 점점 길어졌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로마첸코 vs. 월터스는 무산되었다. 이후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HBO에서 로마첸코 vs. 월터스의 성사를 위해 제시한 금액은 1백만 달러였다. 탑랭크에서는 이 중 월터스의 대진료로 55만 달러를 제안했으나, 월터스 측에서는 세금과 제반 비용을 모두 제하면 55만 달러는 남는 것이 없으며 1백만 달러가 아니면 경기가 수락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1백만 달러는 HBO 측에서 제시한 중계권료 전액과 동일한 수준이었으며, 로마첸코가 조건부로 제시한 승리수당 30만 달러를 월터스의 대진료와 합쳐도 못 미치는 거액이었다.


밥 애럼은 자신이 원하는 경기가 성사되지 못하면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선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애럼은 월터스에게 제시한 55만 달러는 월터스가 이전에 받은 최고 대진료의 세 배나 되는 금액이며, 알 헤이먼이 선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퍼주었기 때문에 선수들의 눈이 터무니없이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큰 기대를 받던 경기가 무산되자 실망한 미디어와 팬들 또한 그 배경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월터스에게 화살을 돌렸다.






월터스와의 경기가 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첸코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큰 경기가 굴러오길 앉아서 기다리는 대신, 곧바로 월장해서 WBO -130파운드 챔피언 로만 마르티네스에게 도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로마첸코는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마르티네스를 압도했고, 마침내 올해의 KO 후보에 선정될 만한 멋진 어퍼컷-훅 콤비네이션으로 경기의 막을 내렸다. 2체급 제패에 성공한 로마첸코는 프로 데뷔 불과 7전만에 파운드 포 파운드 랭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로마첸코의 다음 목표는 올랜도 살리도였다. 탑랭크는 지난  2014년, 로마첸코가 프로에 데뷔한지 불과 2전만에 올랜도 살리도를 상대로 12라운드 경기를 추진했다가 큰 낭패를 본 기억이 있었다. 살리도가 한계 체중인 126파운드를 무려 2파운드나 초과한 채 저울에 올라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랭크는 경기를 강행했고, 살리도는 경기 당일 140파운드가 넘는 체중으로 리게인해서 링에 들어섰다. 압도적인 체중 차이, 처음으로 겪는 12라운드 경기, 프로 경험의 부족 등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로마첸코는 분투했으나 판정운마저 따라주지 않았다.


경기를 지켜본 다수의 기자와 팬들은 로마첸코의 근소한 승리를 채점했으나 판정단은 살리도의 스플릿 판정승을 채점했다. 아마추어 복싱 역사에 남을 커리어를 장식하며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한 최고의 유망주가 데뷔 2전만에 검은 별을 다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 경기 직후에 곧바로 개리 러셀 주니어를 상대로 타이틀전을 치르는 행운이 없었더라면 로마첸코의 커리어는 큰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살리도 2차전은 로마첸코에게 있어서 반드시 치르고 가야 할 숙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살리도 2차전마저 월터스 협상처럼 이번에도 돈이 문제였다. 살리도 측의 주장에 따르면 밥 애럼이 제시한 금액은 마르티네스가 로마첸코를 상대로 받은 대진료(52만 5천 달러)보다도 적은 수준이었으나 애럼은 이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 없으면 경기는 없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살리도의 지난 경기였던 바르가스전은 HBO에서 약 95만 가구의 최고 시청자수를 기록했으나, 로마첸코 vs. 마르티네스는 이에 못 미치는 약 61만 가구였기 때문에 살리도 측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결국 살리도가 다음 상대를 미우라 타카시로 선회하면서 이번에도 로마첸코는 간절히 원하던 경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마첸코에게 있어서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게 된다. HBO 복싱의 최고 흥행 스타 사울 카넬로 알바레스가 리암 스미스전에서 손 부상을 당하면서 12월에 치르기로 했던 경기가 취소된 것이다. 카넬로의 경기가 취소되면서 HBO는 해당 경기에 편성되었던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고, 로마첸코 vs. 월터스를 다시 추진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경기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성사되었다. 월터스가 돈을 핑계로 도망쳤다는 비난과 조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협상 소식이 흘러나온지 불과 2주가 지나기도 전에 로마첸코 vs. 월터스는 마침내 공식 발표된다.


이번 월터스와의 경기는 카넬로의 경기 취소라는 행운이 따랐기에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첸코가 프로 2전만에 당한 불의의 패배 직후, WBO에서 지시한 개리 러셀 주니어와의 타이틀전을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면, 혹은 원하는 경기의 협상이 계속해서 무산된 이후에도 기회가 굴러 오길 기다리기만 하며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면 그는 이처럼 단기간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고, HBO가 여유 예산이 생기기 무섭게 베팅할 정도의 위치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운은 성공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동시에 운은 애초에 거머쥘 능력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있으나마나한 것이기도 하다. 로마첸코는 살리도전의 억울한 패배, 그리고 원하는 경기가 두 번이나 무산되는 등 여러 번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로마첸코는 그에 굴하지 않고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큰 기회가 있다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도전했으며, 결국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로마첸코는 프로 데뷔 후 불과 3전만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며, 7전만에 2체급 제패에 성공하며 파운드 포 파운드 랭킹에 이름을 올렸다. 로마첸코의 잠재적 상업적과 출중한 아마추어 커리어를 감안한다 해도 유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성공을 거둔 것이다. 로마첸코는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선택이 한 선수의 위상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와도 같았다.


아마추어에 이어 프로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길 원하는 로마첸코,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진 부당한 비난에 답하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월터스. 세르게이 코발레프 vs. 안드레 워드에 이어서 최고의 선수들이 모티베이션이 올라온 최적의 시기에 맞붙게 되는 경기가 성사되었다. 부디 해당 경기들이 차질 없이 무사히 진행되어서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실리 로마첸코 - "내 다음 목표는 월터스다."


니콜라스 월터스 - "그 어떤 선수라도 KO는 피할 수 없다. 노니토 도나이레가 내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려보라."




바실리 로마첸코 (Vasyl Lomachenko) vs. 니콜라스 월터스 (Nicholas Walters)

WBO 주니어라이트급(-130lbs) 타이틀전

미국 시각 2016년 11월 28일 10:35 PM, 라스베이거스 코스모폴리탄 센터, H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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